카테고리 없음
[역사 속 전라도] 학문으로는 장성만한 곳이 없다
역사야톡
2022. 4. 22. 19:57
[역사 속 전라도] 학문으로는 장성만한 곳이 없다
서일환 언론학박사·첨단재활요양병원 본부장
장성군(長城郡)은 대한민국 전라남도 서북부에 있는 군이다. 군청 소재지는 장성읍이고, 행정구역은 1읍 10면이다. 전라남도 북부와 전라북도 남부 사이에 있는 내륙 지역으로 광주광역시와 전라북도의 중간 지점의 역할을 한다. 1번국도, 24번국도, 호남 고속도로, 고창담양 고속도로, 호남선철도, 호남선고속철도 등이 지나간다.
장성에서 정읍을 지나 서울로 가려면 전남과 전북의 도계이자 백암산과 입암산 사이의 고갯길인 갈재를 넘어야 한다. 갈재는 달도 숨어 안 보일 정도로 깊은 고개란 뜻으로 월은치(月隱峙)라고 불렀다. 1894년 녹두장군 전봉준이 정읍 황토현에 이어 장성 황룡촌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전주로 향하면서 갈재를 넘었다.
백제 때는 고시이현(古尸伊縣)으로 불렸고 신라 경덕왕 때 한화정책으로 갑성군(岬城郡)으로 개칭됐다. 고려 태조 때 장성현(長城縣)으로 강등되어 영광군의 속현이 되었다. 조선 효종 때 종3품의 도호부사가 파견되는 장성도호부(長城都護府)로 승격했다. 23부로 개편되자 전주부 장성군으로, 13도제로 개편되자 전라남도 장성군이 되었다. 1943년 장성면을 장성읍으로 승격됐다.
정조, "하서는 해동의 염계요, 호남의 공자다"
장성 필암서원은 하서 김인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건립된 서원이다.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았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김인후는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종사 된 동국 18현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 장성으로 돌아와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정조는 "하서는 해동의 염계요, 호남의 공자다."라고 극찬했다. 염계는 공자의 철학을 다시 체계화시킨 북송의 주돈이를 말한다.
기정진(奇正鎭)은 순창에서 태어나서 양친을 잃고 장성으로 이주했다. 병인양요를 맞아 성리학의 화이론을 바탕으로 척화주전론의 상소를 올려 노사학파의 시조가 되었다. 기우만(奇宇萬)은 기정진의 손자로 조부의 뒤를 이어 문유로 추대됐다.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을미의병을 조직했고, 경술국치 이후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하며 은거했다. 기산도(奇山度)는 기삼연의 종손으로 을사늑약에 체결되자 투쟁하다 고문으로 절름발이가 되어 평생을 유랑했다.
흥선대원군,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
흥선대원군은 전국을 유람하며 ‘학문으로는 장성만 한 곳이 없다’라는 뜻으로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이라 하였다. 장성은 정혜 박수량,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노사 기정진 등 걸출한 선비를 배출한 곳이다. 박수량은 늙은 부모 봉양을 위해 벼슬을 사임했고, 정2품 호조판서를 역임했고 2회에 거쳐 청백리에 녹선됐다. 박수량은 "내가 죽거든 절대 시호(諡號)를 청하거나,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하여 비문을 새기지 않고 무서백비(無書白碑)를 남겼다.
백암산(白巖山) 백양사(白羊寺)는 632년 여환선사가 창건한 천년고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이자 오대총림의 하나이다. 임진왜란 직전 환양선사가 중건하고 백화경을 독송하자 흰 양떼가 몰려들어 백양사로 개칭했다. 백양사 경내에 연분홍빛 꽃을 피우는 수령 350년의 고불매(古佛梅)가 천연기념물 제486호로 지정됐다. 또한 "봄 백양, 가을 내장"이라 할 정도로 자연경관이 빼어나서 내장산 국립공원 일부로 지정됐다.
#서일환의역사야톡 #서일환의역사이야기 #첨단재활요양병원 #역사속전라도 #장성 #박수량 #김인후 #기정진 #광주드림
서일환 언론학박사·첨단재활요양병원 본부장
장성군(長城郡)은 대한민국 전라남도 서북부에 있는 군이다. 군청 소재지는 장성읍이고, 행정구역은 1읍 10면이다. 전라남도 북부와 전라북도 남부 사이에 있는 내륙 지역으로 광주광역시와 전라북도의 중간 지점의 역할을 한다. 1번국도, 24번국도, 호남 고속도로, 고창담양 고속도로, 호남선철도, 호남선고속철도 등이 지나간다.
장성에서 정읍을 지나 서울로 가려면 전남과 전북의 도계이자 백암산과 입암산 사이의 고갯길인 갈재를 넘어야 한다. 갈재는 달도 숨어 안 보일 정도로 깊은 고개란 뜻으로 월은치(月隱峙)라고 불렀다. 1894년 녹두장군 전봉준이 정읍 황토현에 이어 장성 황룡촌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전주로 향하면서 갈재를 넘었다.
백제 때는 고시이현(古尸伊縣)으로 불렸고 신라 경덕왕 때 한화정책으로 갑성군(岬城郡)으로 개칭됐다. 고려 태조 때 장성현(長城縣)으로 강등되어 영광군의 속현이 되었다. 조선 효종 때 종3품의 도호부사가 파견되는 장성도호부(長城都護府)로 승격했다. 23부로 개편되자 전주부 장성군으로, 13도제로 개편되자 전라남도 장성군이 되었다. 1943년 장성면을 장성읍으로 승격됐다.
정조, "하서는 해동의 염계요, 호남의 공자다"
장성 필암서원은 하서 김인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건립된 서원이다.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았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김인후는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종사 된 동국 18현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 장성으로 돌아와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정조는 "하서는 해동의 염계요, 호남의 공자다."라고 극찬했다. 염계는 공자의 철학을 다시 체계화시킨 북송의 주돈이를 말한다.
기정진(奇正鎭)은 순창에서 태어나서 양친을 잃고 장성으로 이주했다. 병인양요를 맞아 성리학의 화이론을 바탕으로 척화주전론의 상소를 올려 노사학파의 시조가 되었다. 기우만(奇宇萬)은 기정진의 손자로 조부의 뒤를 이어 문유로 추대됐다.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을미의병을 조직했고, 경술국치 이후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하며 은거했다. 기산도(奇山度)는 기삼연의 종손으로 을사늑약에 체결되자 투쟁하다 고문으로 절름발이가 되어 평생을 유랑했다.
흥선대원군,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
흥선대원군은 전국을 유람하며 ‘학문으로는 장성만 한 곳이 없다’라는 뜻으로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이라 하였다. 장성은 정혜 박수량,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노사 기정진 등 걸출한 선비를 배출한 곳이다. 박수량은 늙은 부모 봉양을 위해 벼슬을 사임했고, 정2품 호조판서를 역임했고 2회에 거쳐 청백리에 녹선됐다. 박수량은 "내가 죽거든 절대 시호(諡號)를 청하거나,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하여 비문을 새기지 않고 무서백비(無書白碑)를 남겼다.
백암산(白巖山) 백양사(白羊寺)는 632년 여환선사가 창건한 천년고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이자 오대총림의 하나이다. 임진왜란 직전 환양선사가 중건하고 백화경을 독송하자 흰 양떼가 몰려들어 백양사로 개칭했다. 백양사 경내에 연분홍빛 꽃을 피우는 수령 350년의 고불매(古佛梅)가 천연기념물 제486호로 지정됐다. 또한 "봄 백양, 가을 내장"이라 할 정도로 자연경관이 빼어나서 내장산 국립공원 일부로 지정됐다.
#서일환의역사야톡 #서일환의역사이야기 #첨단재활요양병원 #역사속전라도 #장성 #박수량 #김인후 #기정진 #광주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