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전라도] 인헌왕후의 관향, 263년 목사골 '능주'
[역사 속 전라도] 인헌왕후의 관향, 263년 목사골 '능주'
능주(綾州)는 화순 지역의 옛 지명으로 구석기 시대부터 인간이 거주했고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출토됐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했다. 근초고왕 때 백제에 복속되어 분지라는 뜻으로 이릉부리(爾陵夫里)라고 불렸다. 757년 신라 경덕왕의 한화정책으로 능성군(陵城郡)으로 개칭됐다. 1143년 고려 인종 때 현령이 파견됐고, 나주와 순천을 연결하는 교통요충지이자 군사요충지로 발전했다.
능주는 조선의 건국과 임진왜란으로 화순군과 병합됐었다가 분리되기를 반복했다. 1632년 인조 때 정원대원군의 왕후이자 인조의 생모인 인헌왕후 구씨(具氏)의 관향이라 능성현에서 능주목(綾州牧)으로 승격했다. 1895년 전국을 23부제로 개편하자 나주부 관할 능주군이 되었고 1896년 전국을 13도제로 환원되자 전라남도 화순군으로 편입됐다. 1914년 능주군과 화순군이 통합되어 화순군이 되었다.
능주목, 13도제로 개편되어 화순군으로 편입
화순군(和順郡)은 전라남도 중앙부에 있는 군으로 1읍 12면에 6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1963년 화순면이 읍으로 승격했고, 2020년 일제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북면을 백아면, 남면을 사평면으로 개칭했다. 국립공원 무등산이 솟아있고 영산강과 섬진강의 지류가 흐른다. 화순 고인돌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고 화순적벽(和順赤壁)은 명승 제112호로 지정됐다.
조광조(趙光祖)는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김굉필에게 수학하여 사림파(士林派)의 영수가 되었다. 성리학적 도학정치를 구현하려 소격서 폐지와 위훈삭제 등을 주창했다. 조광조는 훈구파들이 일으킨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전라도 능주로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37세에 사사됐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됐고 문묘(文廟)에 종사됐다. 조광조는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등과 함께 '동방 5현'이라 일컫는다.
최경희(崔慶會)는 전라도 능주 출신의 기대승의 문인이자 의병장이다. 담양부사로 재직 중에 모친상을 위해 능주로 낙향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1차 진주대첩의 승리를 이끌었고 2차 진주대첩에서 패배하고 자결했다. 주논개(朱論介)는 조선의 열녀이자 최경회의 후실이다. 진주성 전투의 축하연을 하던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끌어안고 투신하여 순국했다.
인헌왕후의 관향, 능주목으로 승격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은 선조의 아들이자 인조의 생부이다. 인조실록에 "성품이 포악하고 행동이 방탕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과 탄핵을 받았다"라고 기록됐다. 아들이 인조반정으로 즉위하자 대원군에 이어 추존왕 원종(元宗)으로 추존됐다. 인헌왕후 구씨(具氏)는 종1품 좌찬성 구사맹의 딸이자 정원대원군의 부인이며 인조의 생모이다. 정원대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되자 인헌왕후로 추존됐다.
16대 인조는 선조의 손자이자 정원군의 아들이며 숙부 광해군을 폐위하고 즉위했다.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으로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까지 도망갔다. 친명배금 정책으로 후금이 침략하자 강화도로 도망갔다. 홍타이지가 후금을 청나라로 개칭하고 병자호란을 일으키자 남한산성으로 도망가서 49일 만에 항복하고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지금도 인조는 아들 소현세자와 며느리 강빈의 독살 의혹을 받고 있다.
주자묘(朱子廟)는 화순군 능주면 덕천리에 있는 건축물이자 주자를 주향으로 모신 사당이다. 주자(朱子)는 남송의 유학자 주희(朱熹)의 존칭이며, 성리학을 집대성하고 체계화하여 주자학을 완성시켰다. 주잠(朱潛)은 주희의 증손자로 고려에 귀화한 신안 주씨(新安 朱氏)의 시조이며 고려에 주자학을 전래했다. 주자묘 1905년 신안 주씨 문중에서 건축했고 1978년 증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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