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전라도] 호남의 정자③ 나주 영모정(永慕亭)과 백호 임제
[역사 속 전라도] 호남의 정자③ 나주 영모정(永慕亭)과 백호 임제
서일환 언론학박사·첨단재활요양병원 본부장
나주는 1018년 전주와 나주의 첫 자를 따서 전라도가 명명했고 1,000년 동안 목사골로 전라도의 중심 기능을 수행했다. 1896년 전라남도 관찰부가 광주로 이전하여 나주가 중심도시 기능을 상실했다. 금성시로 승격하여 나주시로 개칭했다. 1995년 나주시와 나주군을 통합해 도농복형형 나주시(羅州市)가 되었다. 2014년 광주전남 공동 혁신도시인 주시 빛가람동에 신설했다. 나주는 전라남도 중서부에 위치하며 1개 읍, 12개 면, 7개 동에 12만여 명이 거주한다.
영산강이 남쪽으로 흐르다가 광주에서 황룡강 합류하며 다시 나주에서 지석강과 합류한다. 지석강은 드들 처녀를 제물로 묻고 제방을 쌓았다는 전설로 드들강이라 부른다. 나주는 영산강과 지류들의 합류 지점에 나주평야가 형성되어 전남 제일의 곡창지대를 이룬다. 나주는 예로부터 쌀, 면화, 누에고치 생산이 많아 삼백지방(三白地方)이라 하였다. 또한 영산강 연안의 구릉지에서 전국 최고의 나주배가 생산된다. 나주관아 인근에 나주곰탕과 영산포 인근에 흑산홍어가 유명하다.
임제, 황진이 무덤에서 시를 짓고 파직당해
임제는 전라도 나주목 회진리 출신으로 종2품 병마절도사 임진(林晉)의 장남이다. 21세에 서울을 가던 중에 을사사화로 속리산에 은거하고 있던 성운(成運)의 제자가 되어 학문을 익혔다. 중용을 800번이나 읽었으나 과거시험에 번번이 낙방하다가 28세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동시에 합격했다. 정6품 무관인 서북도 병마평사(西北道 兵馬評事)로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40세 연상의 이미 죽은 황진이 무덤을 찾아가 시조를 짓고 술을 올렸다는 이유로 파직됐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을 어듸 두고 백골(白骨)만 무쳣나니.
잔(盞) 잡아 권(勸)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임제는 스승 성운이 사망하자 정5품 예조정랑(禮曹正郞) 겸 홍문관지제교(弘文館知製敎)의 벼슬을 버리고 전국을 유람하며 음풍영월(吟風詠月)로 현실을 비판했다. 임제는 제주목사인 아버지 임진(林晋)을 만나기 위해 제주에 왔다가 열녀의 행실을 기록한 ‘김덕천전(金天德傳)’과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등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곡(哭)하지 말라”라고 물곡사(勿哭辭)를 남기고 고향인 나주목 회진리에서 3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호남의 5대 정자 영모정, 임제의 흔적 남아
임붕(林鵬)은 정3품 호조참의와 광주목사를 역임했고 낙향하여 나주목 회진리에 귀래정(歸來亭)을 짓다가 사망했다. 임붕의 아들인 임복, 임진 형제가 귀래정을 완공하여 영모정(永慕亭)으로 개칭했다. 임복(林復)은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유배됐고 임진(林晉)은 제주목사와 병마절도사를 역임했고 청백리에 녹선됐다. 영모정은 임붕의 손자이자 임진의 아들인 천재시인 임제가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어 광해군 때 증건됐다.
영모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누정으로 온돌방 1칸과 누마루 2칸으로 주위에 폐쇄적 벽과 문으로 구성됐다. 영산강을 굽어보는 언덕 위에 400년 된 팽나무, 느티나무, 푸조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영모정 옆에는 ‘나주 임공붕 유허비’, ‘백호 임제선생 기념비’, ‘백호 임제 선생 기념관’이 있다. 나주 영모정에 가면 ‘취하면 노래하고 술깨면 비웃으니 세상이 싫어하네’라던 풍류남아(風流男兒) 임제의 아름다운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서일환의역사야톡 #서일환의역사이야기 #첨단재활요양병원 #역사속전라도 #호남의정자 #영모정 #나주 #임제 #광주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