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환의 역사이야기 / 선조특집 / 6 기축옥사)
(서일환의 역사이야기 / 선조특집 / 6 기축옥사)
기축옥사(己丑獄事)는 1589년 10월 정여립이 모반을 꾸민다는 고변으로 3년간 1,000여 명의 동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조선시대 역모 사건 중에서 희생자가 가장 많이 발생했고 정여립의 옥사라고 한다
정여립(鄭汝立)은 전라도 전주부 출신으로 익산군수 정희증의 아들이며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24세에 식년시에 급제했다 이조판서 이이는 서인을 중요하고 동인을 배척했고 제자 정여립의 이조전랑 임명에도 반대했다
정여립은 선조에게 붕당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할 것을 건의하였으니 받아들여지지 않자 서인을 탈당하고 동인으로 변경했다 선조를 비롯한 이이 성혼 조헌 정철 등의 미움을 받자 낙향하여 대동계(大同契)를 결성하여 왜구를 토벌했다
정여립은 신분에 제약을 두지 않고 매월 15일 말타기 활쏘기 칼쓰기 등 무예를 연마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전라도 전주 김제 진안 운봉은 물론 황해도 안악과 해주를 왕래하며 대동계를 전국으로 확대했다
황해도관찰사 한준,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이 정여립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했다 선조의 체포령이 떨어지자 정여립은 전라도 죽도에서 사망했다 지금까지 정여립의 자살설과 피살설이 공존하고 있다
선조는 정여립 역모 사건의 위관(委官)으로 정철을 임명했다 정철은 서인의 영수 이이가 사망하여 동인에게 빼앗겼던 정권을 되찾기 위해 정여립이 동인들과 교분이 있는 점을 악용해서 2년 동안 동인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관기와 이별한 전라도도사 조대중이 눈물을 흘렸다가 역적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사사됐고 안질을 앓던 황주목사 백유함이 눈물을 흘렸다가 정여립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처형했다 부제학 이발은 80대 노모와 10세 아들과 함께 고문으로 사망했다
기축옥사로 영의정 노수신, 우의정 정언신 등이 파직됐고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는 선조에게 국문을 당했다 정여립과 가깝다는 이유로 1천여 명의 동인 계열 인사와 가족들이 살해됐다 전라도는 반역향으로 지목되어 인재 등용에 차별을 당했다
정여립은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정해진 임금이 있겠는가?’ 라는 천하공물설 (天下公物說)과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 라는 하사비군론 (何事非君論)를 혁명적인 사상을 주장을 하였다
기축옥사는 서얼 출신인 송익필이 조작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송익필은 아버지 송사련이 안처겸의 역모를 고발하여 안씨 일가를 멸문시키고 당상관에 올랐다 동인들에 의해 안처겸의 역모가 조작임이 밝혀져서 안씨 집안의 노비로 환속됐다
송익필(宋翼弼)은 이산해 정철의 집을 전전하며 숨어다니다가 호남에 있는 정여립을 만났다 동인에 대한 원한으로 정여립이 모반을 꾀한다고 고변을 하여 기축옥사를 배후 조정하였다 동인의 영수인 이산해를 비난하여 유배되어 객사했다
#서일환의역사야톡 #서일환의역사이야기 #첨단재활요양병원 #선조특집 #기축옥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