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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환의 역사이야기 / 붕당특집 / 6 송시열)

역사야톡 2023. 8. 27. 19:57

(서일환의 역사이야기 / 붕당특집 / 6 송시열)

송시열(宋時烈)은 충청도 옥천 출신으로 부친 송갑조로부터 '주자(朱子)는 후세의 공자이고 율곡은 후세의 주자이니, 공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사마시에 장원급제하여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가르쳤다

조선이 만주족 청나라의 침략을 받자 송나라가 여진족 금나라의 침략을 받아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재건되는 것처럼 바라봤다 송시열은 주자의 사상으로 극복하는 것이 해답이라고 판단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송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조선이 항복하자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10년 동안 은둔했다 효종이 즉위하자 정계에 진출하여 중화를 숭상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춘추의리(春秋義理)를 주창했다

송시열은 삼전도의 치욕을 씻고 명나라의 원수를 갚자는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주장하며 북벌론을 제시했다 사직과 복직을 반복하며 청나라 정벌을 주장하던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매도했다

송시열은 주자학의 대가이자 서인의 영수이며 명나라 사대주의에 빠져 조선을 당쟁으로 이끌었다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동시에 받고 있다 신하로서는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많은 횟수가 거론된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와 강회빈이 죽임을 당하자 차남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했다 서인들은 소현세자의 죽임을 억울한 죽음으로 규정했다 남인들은 효종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행위라고 규탄했다

1차 예송논쟁(기해예송)은 효종이 사망하자 계모인 자의대비의 상복 입는 기간을 두고 일어난 논쟁이다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들은 효종이 인조의 차남이라 계모인 자의대비는 차남의 예를 따라 1년의 기년복(朞年服)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휴 허묵 등 남인들은 차남이나 왕위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장남의 예를 따라 3년의 삼년복(三年服)을 주장했고 심지어 윤선도는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송시열의 서인이 승리하고 남인은 축출됐다

2차 예송논쟁(갑인예송)은 효종비가 사망하자 계모인 자의대비의 상복 입는 기간을 두고 일어난 논쟁이다 서인들은 효종비는 차자비라며 9개월의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했고 남인들은 장자비라며 1년의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했다

현종의 장인인 정2품 도총관 김우명과 처사촌인 정3품 좌부승지 김석주가 서인이지만 송시열을 축출하기 위해 남인과 결탁하여 기년복을 관철하여 서인은 축출되고 송시열은 유배됐다

송시열은 숙종이 즉위하고 경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석방되어 복위했다 송시열은 장희빈의 아들의 왕세자 책봉에 반대하던 기사환국으로 제주도로 유배됐다 다시 신문하기 위해 한양으로 압송 도중 전라도 정읍에서 사사됐다

송시열은 인현왕후가 복위하는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됐다 영조는 영의정으로 추증했고 정조는 송시열을 공자 맹자 순자 한비자 주자에 버금가는 송자(宋子)로 추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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