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환의 역사이야기 / 식민지 예술인 특집 / 2 식민지 신여성 ‘나혜석’)
(서일환의 역사이야기 / 식민지 예술인 특집 / 2 식민지 신여성 ‘나혜석’)
나혜석(羅蕙錫)은 수원에서 종2품 호조참판 나영완의 손녀이자 종4품 시흥군수 나기정의 딸로 태어나서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도쿄에서 일본인 청년들의 구애를 거절하고 유부남 애인 최승구가 요절하자 친일파 이광수와 염문을 뿌렸다
나혜석은 여러 명의 첩을 둔 아버지를 보고 축첩제도와 정조관념에 저항했다 ‘양부현부(良夫賢父) 교육법이 없는 현모양처(賢母良妻) 교육법은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부덕(婦德)을 장려한 것이다’라고 1914년 ‘학지광’지 12월호에 발표했다
도쿄에서 2·8 독립 선언에 참가했고 서울에서 3·1 만세 운동에 참가하여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됐다 가석방되어 변호를 맡아주던 김우영과 결혼하고 유럽을 여행하여 '조선 최초로 구미 여행에 오른 여성'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기생 강명화는 갑부 장병천의 부모가 결혼을 반대하자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나혜석은 기생이라는 이유로 천대와 멸시를 받는 세태를 비난하며 '결혼은 도덕도 법률도 아닌 취미'라고 자유 연애론을 주장했다
나혜석은 파리에 머물면서 변절자 최린과 염문을 뿌렸다 김우영으로부터 이혼을 통보받았고 최린으로부터 결별을 통보받았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후회한다'고 밝히고 ‘조선 남성은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여자에게 정조를 요구한다’라고 비난했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나혜석의 ‘이혼고백서’의 일부다
우울증과 중풍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수덕여관에서 이응로 화백의 스승이 되었다 조선총독부로부터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받았지만 거부했고 징용을 독려하는 강연도 거절했다
관보에 '영양실조로 사망한 신원 미상의 무연고자 시신을 찾아가라'는 광고가 실렸다 나혜석은 해방불명되었다가 변사체로 발견됐다 개인주의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나혜석의 이름은 금기됐다 2000년대 자유주의 인권운동가로 재조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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