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서일환의 역사이야기 / 신라특집 / 8 골품제도)

역사야톡 2024. 3. 26. 19:52

(서일환의 역사이야기 / 신라특집 / 8 골품제도)

골품제도(骨品制度)는 혈통에 따라 신분에 제한을 두었던 폐쇄적인 신라 사회의 신분제도이다 1,000년 동안 지속된 골품제도는 왕족은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로 구분되며 귀족은 6~1두품(頭品)으로 나뉘었다

진흥왕의 정비인 사도왕후 박씨 계통을 성골이라 하고 모후인 지소태후 김씨 계통을 진골이라 한다 성골은 왕족 내부의 족내혼으로 태어난 집단이고 진골은 왕족과 다른 귀족의 혼인으로 태어난 집단이다

시조 박혁거세부터 28대 진덕여왕까지 왕족은 성골이고 29대 태종무열왕부터 진골(眞骨)이 계승했다 신라가 세력이 확대되자 금관가야의 구형왕과 왕족인 김유신과 고구려 멸망 이후 보덕국의 군주인 안승이 진골 대접을 받았다

<나라 사람들은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여왕까지 28명의 왕을 성골이라 하고, 무열부터 마지막 왕까지를 진골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일부이다 최치원은 6두품 출신으로 시무 10조가 진골 귀족의 반대로 채택되지 못했다

신라의 왕족은 성골과 진골이고 귀족은 6두품 5두품 4두품이다 평민은 3두품 2두품 1두품이고 노비는 0두품이다 골품은 원칙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는다 골품에 따라서 올라갈 수 있는 벼슬에도 제한이 있었다

신분에 따라 집의 크기는 물론 겉옷과 속옷에 사용되는 옷감의 종류와 색상, 관(冠)과 요대 및 신발의 재질, 장신구의 재료까지 정해졌다 진골 출신들은 왕위계승을 놓고 벌인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서 지방 호족으로 전락하여 위기를 자초했다

중앙귀족은 권력을 독점하여 국가 통제력이 상실되고 지방호족의 불만은 고조됐다 계속된 자연재해와 기형적 수취체계의 모순으로 농민민란이 일어나서 사회경제적 기반이 붕괴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서일환의역사야톡 #서일환의역사이야기 #행복한요양병원 #신라특집 #골품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