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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환의 역사이야기 / 후삼국특집 / 3 태봉 궁예)

역사야톡 2024. 4. 30. 19:50

(서일환의 역사이야기 / 후삼국특집 / 3 태봉 궁예)

궁예(弓裔)는 삼국사기에 신라 47대 헌안왕 또는 48대 경문왕의 서자(庶子)라고 기록됐다 궁예는 신라 왕실에서 버려져 유모가 목숨을 건졌지만 손가락으로 손이 찔러 한쪽 눈을 실명했다 궁예가 10여 세가 되자 세달사(世達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진성여왕이 즉위하자 계속된 흉년과 가혹한 세금을 견디지 못하고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궁예는 강원도 군벌 양길(梁吉)의 휘하에 들어가서 활약하며 강원도를 장악했다 견훤이 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하자 궁예는 철원에서 고려를 건국했다

궁예는 송악의 해상호족 왕륭이 항복하자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개칭하고 수도로 송악으로 천도했다 궁예는 왕륭의 아들인 왕건을 철원군태수에 임명했다 처음으로 팔관회를 개최했고 왕건을 2인자로 중용하여 후백제의 배후인 나주를 공격했다

궁예는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개칭하고 수도를 철원으로 천도하고 스스로를 현세의 미륵(彌勒)을 자처했다 궁예는 견훤이 나주에서 반격하자 왕건을 파진찬 겸 문하시중으로 임명하고 나주로 파견했다 왕건은 나주 지역을 안정시키고 돌아왔다

궁예는 왕건이 세력과 입지가 강화되자 위협을 느끼고 역모죄로 몰아 죽이려는 공포정치를 행했다 신숭겸 홍유 복지겸 배현경 등이 역성혁명을 일으켜서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옹립하고 고려(高麗)를 건국한다

궁예는 철원 왕궁을 탈출하여 달아나다가 화전민들에게 발각되자 한탄강 자살바위에서 자결했다 궁예의 장남 신광(神光)은 광산 이씨의 시조로 알려졌고 차남 청광(淸光)은 순천 김씨의 시조로 알려졌다

"집권 후반기에는 스스로를 미륵이라 자칭했으며 관심법(觀心法)으로 인간의 생각을 꿰뚫어 본다고 주장하고 법봉(法棒)을 사용하여 가신들을 때려죽이는 등 광기를 일으켰다"라고 고려사에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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