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환의 역사이야기 / 영암 산골정 산자)
은적산(隱跡山)은 영암군 서호면과 학산면을 경계로 남북으로 뻗어 있다. 함정굴재부터 구멍바위, 상은적봉, 관봉, 하은적봉, 미다리마을까지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겹쳐있다. 상은적봉은 최고봉이고, 하은적봉은 최북단에 있다. 은이 쌓여 있어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은적산(銀積山)으로 표기됐다. 일제가 은을 채굴하기 위해 은굴을 수십 개나 구멍을 뚫었다.
대박산(大朴山)은 은적산의 중앙에 있는 봉우리로 과거시험에 급제한 선비가 관모를 쓰고 있는 형상의 바위가 있는 산봉우리이다. 대박산을 관봉(冠峰), 관대봉(冠大峰), 간대바위 등으로 불렸다. 대박산에서 바라보면 동쪽으로 월출산의 월출이 황홀하고, 서쪽으로 유달산의 일몰이 아름답다. 추석이 되면 산골정 형제들은 소호정에서 모여 함께 대박산에 올라 호연지기를 키웠다.
산골정(産骨亭)은 대박산 기슭에 자리 잡은 이천서씨 집성촌인 소호종가(蘇湖宗家)를 이루는 마을이다. 천연동(天然銅)의 일종인 산골(山骨)이 나오는 마을이라 산골정이라 한다. 산골은 동의보감에는 부러져 다친 곳을 치료하며 본초강목에는 전염병 예방에 사용한다고 기록됐다. 산골정 인근에 왕인박사 유적지, 도갑사, 구림마을, 장천리 선사시대 주거지, 엄길리 암각매향명, 학파농장, 독천낙지마을 등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영암군 서호면 산골정을 ‘신풍부락’으로, 장복골을 ‘영풍부락’으로 개칭하고 ‘쌍풍리’라고 하였다. 신풍(神風)은 일제의 자살 특공대 가미카제를 말하고 영풍(靈風)은 일본 정벌을 나섰던 려몽 연합군을 침몰시킨 바람을 말한다. 산골정은 앞마을에 70여 가구와 뒷마을에 30여 가구가 사는 큰 마을이며 자자일촌으로 고개만 돌려도 아제, 당숙모, 형님, 형수, 동생, 조카, 질부 등이 즐비한 곳이다.
산골정은 유난히 겨울이면 동네에 제사가 많았다. 제삿날 저녁이면 제삿집에 ‘단자야’하고 소리치고 마루에 바구니를 던지면 아짐이 바구니에 떡, 나물, 과일을 잔뜩 담아주는 단자를 하였다. 한겨울에 심심하면 아제와 형들이 전등불로 초가집 처마에 사는 참새를 잡아 구워 먹기도 하였고, 옆 동네 가서 주인 모르게 닭을 잡아 와서 삶아 먹는 닭서리도 하였다.
소호정(蘇湖亭)은 1612년 서희서가 산골정 마을 입구에 지은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단층 구조이다. 소호정은 뒤에는 대박산, 앞에는 서호강의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에 자리했다. 좌의정 이정귀, 예조판서 신흠, 형조판서 이안눌, 암행어사 신명규 등이 소호정에 들려 경치를 극찬하고 시문을 남겼다. 소호정은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소실되어 초석만 남아 있는 것을 중건했다.
소호정은 중국 쑤저우(蘇州)와 항저우(杭州)의 시후(西湖)를 본떠 지은 이름이다. ‘해동의 명승지라 청서와 잇닿았나니 / 사람은 동오와 같고 땅은 소주(蘇州)보다 나아라 / 한 줄기 물은 멀리 드넓은 평야 둘러싸고 / 어지러운 산들은 둥글게 외로운 정자 에워 쌌어라’ 좌의정 이정귀(李廷龜)가 소호정을 방문하여 남긴 시조이다. 소호정은 덕진 영보정과 구림 회사정과 더불어 영암의 3대 정자 중 하나이다.
소호정은 어린 시절의 수많은 추억이 깃든 곳이다. 여름방학이 되면 밤에는 모기장을 치고 수박 서리를 하여 먹기도 하고 잠을 자기도 하였다. 바둑과 장기를 배웠고 땅치기와 대방구를 하였고 호박곤과 수박곤을 두며 원대한 꿈을 꾸었다. 일요일 아침에는 애향단에서 남자는 마당을 청소했고 여자는 마루를 청소했다. 붉은 배롱나무와 노란 은행나무가 어우러진 소호정은 추억의 산실이다.
문산댁은 구림마을에서 산골정으로 시집와서부터 초가집에서 산자(馓子)를 만들었다. 성호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쌀 알을 튀기면 마치 꽃처럼 부풀어 벌어지므로, 이렇게 만든 고물을 묻힌 유전병류를 산자라 한다.” 라고 기록했다. 곡창인 전라남도 영암은 예로부터 눈처럼 희고 소담하게 만든 백산자가 명물로 알려졌다. 하늘로 떠나신 어머니 문산댁의 뒤를 이어 큰형수가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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