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전라도] 가사문화 특집 ① 소쇄원과 양산보
서일환 언론학박사·행복한요양병원 본부장
담양 소쇄원, 완도 세연정, 영양 서석지를 우리나라 3대 민간 정원이라고 한다. 딤양 소쇄원은 양산보가 낙향하여 담양 지곡마을에 조성한 정원으로 가지고 있는 기운이 맑고 깨끗해진다는 뜻이다. 완도 세연정은 윤선도가 완도 보길도에 정자를 짓고 말년에 풍류를 즐긴 정자로 기분이 상쾌해진다는 뜻이다. 영양 서석지는 정영방이 영양 연당마을에 건립한 개인 누정으로 연못에 60여 개의 서석들이 있다는 뜻이다.
양산보(梁山甫)는 외가인 창평에서 태어나서 15세가 되어 한양으로 상경하여 조광조의 문하에서 소학(小學)을 학습했다. 17세의 나이로 현량과(賢良科)에 추천됐으나 등용되지 못했다. 중종이 양산보를 애석하게 여기고 지필묵을 하사했다. 스승 조광조가 훈구파가 일으킨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전라도 능주(綾州)로 유배되어 사사되자 박상, 양팽손, 임억령, 유성춘, 양산보 등 호남 사림들이 낙향했다.
양산보는 고향인 담양도호부 지곡리로 낙향하여 무등산 아래에 지붕을 풀로 덮은 별서정원을 짓고 소쇄원(瀟灑園)이라 이름했다. 양산보는 벼슬을 포기하고 평생을 초야에 묻혀 은둔했다. 양산보는 중종과 명종이 관직을 제수하려고 하였지만 사양하고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익히며 후학을 양성하다가 55세로 사망했다. 고경명이 제문(祭文)을 짓고, 송순, 임억령, 김인후, 기대승, 양응정 등이 만장(挽章)을 지어 애도했다.
소쇄원, 우리나라 3대 민간정원
소쇄원(瀟灑園)에는 김인후가 소쇄원 48영(瀟灑園 四八題詠), 정철이 소쇄원제초정(瀟灑園題草亭) 등을 남겼고 영조 때 송시열이 그린 그림을 판각한 소쇄원도(瀟灑園圖)가 간행됐다. 소쇄원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양산보의 손자 양천운과 현손인 양경지가 중수했다. 소쇄원의 제월당(霽月堂), 광풍각(光風閣), 오곡문(五曲門), 애양단(愛陽壇), 대봉대(待鳳臺), 고암정사(鼓巖精舍) 등이 명승 제40호로 지정됐다.
조광조(趙光祖)는 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金宏弼) 문하에서 소학과 대학을 수학했다.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 사림파의 영수가 되어 반정공신의 위훈삭제, 현량과 실시, 소격서 혁파 등을 주창하며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했다. 기묘사화로 전라도 능주(綾州)로 유배되어 37세의 나이로 사사되어 영의정에 추증됐고 문묘에 종사되어 해동 18현의 한 사람이 되었다.
양산보, 기묘사화로 낙향하여 은둔
기묘사화(己卯士禍)는 조광조의 급격한 개혁에 부담을 느낀 중종이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을 앞세워 자행한 친위 쿠데타이다. 조광조, 기준, 김정 등이 유배되어 사사됐고, 김식, 김구, 박세희, 박훈, 한충 등이 유배됐고 안당, 김안국, 김정국 등은 파면됐다.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사림들을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 부른다. 기묘사화로 사람들의 정치적 진출이 좌절됐으나 학문적 발전을 이뤄졌다.
호남가단(湖南歌壇)은 16세기 중반에 송순의 면앙정, 임억령의 식영정, 김성원의 서하당, 양산보의 소쇄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가단이다. 담양의 송순, 남평의 박순, 성산의 임억령, 장성의 김인후, 광산의 기대승, 나주의 임제, 창평의 정철 등과 교유하며 집단적으로 시가를 향유했다. 대표적인 가단으로 면앙정가의 송순을 중심으로 하는 면앙정가단과 성산별곡의 정철을 중심으로 하는 성산가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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