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환의 역사이야기 / 일제침략 특집 / 2 쇄국정책과 '척화비')
인평대군은 인조의 아들이며 소현세자와 효종의 동복동생이다 인평대군은 삼촌인 능창대군의 양자로 입적됐다 남연군은 이병원의 아들이자 인조의 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이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아들이며 정조의 아버지이자 은신군의 이복형이다 남연군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됐다 은신군은 역모로 몰려 제주로 유배되어 위리안치가 되었다 여흥민씨와 결혼하여 흥녕군 흥완군 흥인군 흥선군 등 4남1녀를 낳았다
남연군은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었으나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되자 불우한 세월을 보내다가 사망하여 경기도 연천군에 묻혔다 아들 흥선군이 아버지 남연군을 이장하기 위해 충남 예산군 가야사를 불태웠다
흥선대원군은 가야사로 이장한 덕분에 아들이 왕이 되고 자신은 대원군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가야사 자리에 보덕사를 세웠다 1866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묘를 도굴하자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흥선대원군은 신미양요에서 미국을 물리친 직후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이라는 척화비를 세웠다 흥선대원군이 청으로 끌려가자 일제가 철거했다 청주 경주 부산 함양 등에 척화비가 남아 있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이를 자손만년에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지어 신미년에 세움’이라고 새겨졌다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자 명성황후는 쇄국정책을 백지화하고 개방정책을 추진했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죽음과 관련하여 아들 고종으로부터 외면받고 백성으로부터 지탄받고 지내다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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