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전라도] 구례 운조루와 ‘타인능해’
구례는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한 구차례현(仇次禮縣)으로 불렸다. 신라 경덕왕 때 구례현(求禮縣)으로 개칭하여 1895년 전라남도 구례군(求禮郡)이 되었다. 소맥산맥의 줄기를 이루는 지리산의 서남부에 위치하고 지리산국립공원에 속하여 자연경관이 아름답다. 지리산 반야봉과 노고단을 비롯해 천년고찰 화엄사, 천은사, 연곡사, 사성암 등이 있고 아름다운 섬진강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정유재란 당시 석주관성 전투에서 수백 명의 의병들이 숨졌다. 석주관성은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기 위해 구례에 쌓은 성으로 영호남의 4대 관문의 하나이다. 1906년 의병장 고광순이 구례에서 항일의병을 일으켜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뜻으로 태극기에 불원복(不遠復)을 새기고 일본군과 싸우다 연곡사에서 순국했다. 1910년 '매천야록'을 남긴 황현은 경술국치의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절명시를 남기고 광의면 수월리에서 자결했다. 구례는 한국전쟁 전후 지리산 빨치산의 아픈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유이주, 금환낙지의 명당자리에 ‘운조루’ 지어
토지면 오미리에 1968년 국가민속문화재 제8호로 지정받은 구례 운조루 고택(求禮 雲鳥樓 古宅)이 있다. 국가지정문화재는 국보, 보물, 국가무형문화재, 사적, 명승, 천연기념물, 국가민속문화재 등 7개 유형으로 구분한다. 국가민속문화재는 ‘선조들의 생활문화 유산으로 역사상, 학술상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문화재’를 말한다. 중요민속자료 제1호는 순조의 셋째 딸이 입었던 ‘덕온공주 당의’이며 현재 296호까지 지정됐다.
구례 운조루 고택은 1776년 유이주(柳爾胄)가 지리산과 섬진강이 만나는 금환낙지(金環落地)의 명당자리에 건립한 고택이다. 금환낙지는 하늘에 사는 선녀가 경치 좋은 이곳에 가끔 하강하다가 손가락에 낀 반지를 구름 위에서 잃어버렸다고 전하는 명당이다. 유이주는 경북 안동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종5품 함경도 삼수 부사를 거쳐 정4품 전라도 낙안 군수에 재임 시 구례군 토지면에 99칸의 운조루를 지었다. ‘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란 뜻으로 도연명(陶淵明)의 시구에서 따서 운조루라고 하였다. 도연명은 중국 남북조 시대에 평생을 은둔하며 활동한 대시인으로 귀거래사(歸去來辭), 도화원기(桃花源記) 등을 남겼다.
타인능해, 배고픈 자 누구든 쌀을 가져갈 수 있어
운조루의 99칸 대저택은 지금 63칸만 남아 있고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쌀 2가마 반이 들어가는 뒤주가 하나 놓여 있다. 쌀뒤주 밑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씨 사이에 조그만 구멍이 뚫려 있다. 배고픈 사람은 누구든 뒤주에서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하였다. 유이주는 매년 생산되는 쌀 200가마니 중 40가마니를 가난한 이웃에게 내놓았다고 한다. 운조루 덕분에 구례에는 배고파 죽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한다. 운조루의 타인능해 정신은 여순사건, 한국전쟁 등의 참화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경주의 만석꾼 최진립은 ‘만 석 이상의 재산을 쌓지 말라.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지 말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이 없게 하라.’고 후손들에게 가르쳤다. 300년 동안 계속된 최부잣집의 전통은 일제 강점기에 독립자금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큰 돈을 보냈다. 안동 학봉종택의 종손 김용환은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했다. 파락호로 지탄을 받던 김용환은 실은 도박이 아니라 독립자금으로 전 재산을 바쳤다. 지금도 구례 운조루의 타인능해 정신은 경주 최부잣집과 안동 학봉종택과 더불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로 칭송을 받고 있다. 갑질이 계속되고 있는 요즘 있는 자들의 사회적 책무가 더욱 절실할 뿐이다.
#서일환의역사야톡 #서일환의역사이야기 #역사속전라도 #운조루 #유이주 #최부잣집 #김용환 #광주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