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역사 속 전라도] 호남미술의 뿌리, '오지호' 화백

역사야톡 2019. 5. 30. 15:30

[역사 속 전라도]호남미술의 뿌리 오지호 화백

 

서일환<상무힐링재활병원 행정원장> 

 

오지호(吳之湖)는 1905년 전남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 모후산 자락에서 8남매 막내로 태어난 화가이다. 아버지 오재영은 대한제국의 보성군수를 역임했고 3·1운동 직후 나라 잃은 설움으로 자결했다. 오지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주고보에 입학했고 휘문고보에 편입하여 정지용, 이태준, 박종화, 김영랑 등과 교유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의 유화 ‘농가’를 보고 그림에 눈을 떴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으로부터 미술을 배웠다. 일본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사실적 인상주의 화법의 유화를 그렸다.

 

1928년 미술로 민족사상을 심어주기 위해 김주경, 박관진 등이 창립한 녹향회(綠鄕會)에 참여했다. 녹향회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해산됐다. 오지호는 김주경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의 컬러로 ‘오지호-김주경 2인 화집’을 발간하여 한국회화사의 한 획을 그었다. 김주경은 해방이 되자 월북하여 금기의 인물이 되었다. 오지호는 일본에서 귀국하여 개성 송도고보 교사로 10년 동안 재직했다.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여 제자들의 졸업앨범에 유일한 조선인 이름으로 남아 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총독부의 전쟁기록화 제작을 거부하며 일제에 항거했다.

 

▲ 일제와 독재에 협조하지 않아

 

오지호는 해방이 되자 광주로 귀향하여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창설을 주도하여 교수로 임명됐다. 좌익계열에서 조직한 ‘조선미술동맹’에 참여했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남부군이 되어 지리산에서 활동하다가 구속되어 생가에 남아 잇던 초기의 작품은 모조리 소실됐다. 석방이 되어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복직하여 광주의 초옥에서 서양의 인상파 기법을 따르지 않고 우리나라 인상주의 회화를 개척했다. 오지호는 4·19 혁명이 일어나자 교수직을 그만두고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하지만 5·16 반란으로 다시 구속됐다. 

 

오지호는 1968년 ‘현대 회화의 근본 문제’를 발표하며 교과서에 국한문 혼용을 주장했다. 1971년 ‘국어에 대한 중대한 오해’를 집필하여 ‘한자 교육은 반드시 초등학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신념을 피력했다. 또한 유신체제에 저항하다가 구속된 양심수의 석방과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날을 공휴일로 지정하자는 주장을 신문에 발표했다. 1973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모란장을 수상했고, 1977년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했다. 2002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금관장이 추서됐다.

 

오지호는 아내의 상(1936), 사과밭(1937) 남향집(1939), 가을풍경(1953), 추광(1960), 항구(1970), 함부르크의 항(1972), 노틀담의 풍경(1975), 설촌(1979) 등을 남겼다. 1982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7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미망인이 유작 34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오지호의 대표작인 ‘남향집’은 개성 송도고보 교사로 재직 중에 살고 잇던 집을 그린 그림이다. 초가집에 단발머리 딸과 삽살개를 함께 그렸다. 인상주의 화가답게 나무 그림자까지 파란색으로 표현했다.

 

‘오지호 생가’는 전남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에 있는 고택으로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1800년 경 오지호의 6대조가 향교자리에 상량했고 4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남아 있다. 본래는 초가집이었으나 기와집으로 교체했고 국가등록문화재 제274호로 지정됐다. 생가 옆에는 오지호와 장남 오승우, 차남 오승윤, 손자 오병재의 작품을 비롯해 유품을 전시한 오지호 기년관이 있다.

 

▲한국 최초의 인상주의 화백

 

‘오지호가’는 광주광역시 동구 지산동에 있는 집으로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知天命)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여 년을 살았던 집이다. 안채는 100년 된 초가집으로 옛날의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고 문간채는 서양식 건물로 북쪽 천장에 채광창을 내어 화실로 사용했다. 광주광역시는 2009년 오지호를 추모하기 위해 지산유원지에서 동명동을 잇는 2,353m 도로를 ‘지호로’로 명명했다.

 

오지호는 1959년 논문 ‘구상회화선언’과 1968년 미술평론집 ‘현대회화의 근본문제’를 출판했다. 1978년 ‘오지호 작품집’, 1979년 시론인 ‘알파벳트 문명의 종언’, 1992년 미학원론이자 유작인 ‘미와 회화의 과학’ 등을 남겼다.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지난 4월 2일부터 6월까지 ‘남도미술-뿌리 Roots’전을 개최하고 있다. 오지호의 ‘남향집’을 비롯해 허백련의 ‘응시도’, 허건의 ‘목포다도일우’, 김환기의 ‘산월’ 등 소중한 예술작품을 직접 볼 수 있다.

 

#서일환의역사야톡 #서일환의역사이야기 #역사속전라도 #오지호 #남향집 #오지호생가 #오지호가 #광주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