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전라도]광주 3충신 중 한명 전상의 장군
서일환<상무힐링재활병원 행정원장>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순국한 충렬공 `고경명’과 충장공 `김덕령’,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과 싸우다가 순절한 구성공 `전상의’ 등 3인은 나라로부터 정려(旌閭)를 받아 `광주의 3충신’이라고 부른다. 정려는 유교적인 풍습을 교화하기 위해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부, 열녀 등을 선정하여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제도이다. 고려 태조가 개국공신을 표창하며 정문을 세웠고 조선 세종이 효자와 효녀를 기리기 위해 정문을 세웠다.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이후 민심을 격려하고 삼강을 장려하기 위해 정려문(旌閭門)을 세웠으며 붉은 칠을 하여 홍살문이라고 한다.
고경명·김덕령과 정려를 받아
고씨삼강문(高氏三綱門)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금산전투에서 사망한 고경명을 비롯한 1충, 3효, 2열, 1절 등 7명을 기리기 위해 헌종의 어명으로 광주시 남구 압촌동에 세운 비석과 비각이다. 1충은 고경명, 3효는 장남 고종후, 차남 고인후, 손자 고부금, 2열은 둘째딸 장흥 고씨와 조카며느리 광산정씨, 1절은 동생 고경형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사한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3부자와 유팽로, 안영 등 5위를 배향하기 위해 건립된 사당이 `포충(褒忠)’이라고 사액됐다. 고씨문중의 노비 봉이와 귀인도 의병으로 싸우다가 전사하여 포충사에 충노비(忠奴碑)를 세웠다. 의병장 고경명은 종1품 좌찬성에 추증됐고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3부자가 불천위로 모셔졌다.
충효동 정려비각(忠孝洞 旌閭碑閣)은 김덕령 장군과 부인 흥양이씨, 형 김덕홍, 동생 김덕보를 기리기 위해 정조의 어명으로 광주시 북구 충효동에 세운 비석과 비각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김덕령은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옥사했고, 부인 이씨는 정유재란 당시 추월산에서 왜군을 피해 자결하여 정절을 지켰다. 김덕홍은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의병장 고경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김덕보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싸웠으나 형제들이 사망하자 무등산 자락에 풍암정을 짓고 은둔했고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장 김덕령은 종1품 좌찬성에 추증됐고 충장공 김덕령의 시호를 따서 `충장로’로 명명됐다.
전상의는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했고 광해군의 신임을 받아 국왕의 호위와 대궐의 경비를 맡아보는 내금위의 정3품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임명됐다. 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아 종4품 개천군수로 강등됐고 다시 종3품 구성부사로 승진했다. 전상의는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좌영장(左營將)으로 임명되어 평안병사 남이, 안주목사 김준과 함께 안주성 전투에 참전하여 전세가 불리하자 자결했다.
정묘호란 당시 후금과 싸우다 순절
인조는 전상의를 정2품 병조판서에 추증하고 예장(禮葬)으로 장례를 치르고 사패지를 하사했다. 예장은 국가에서 예를 갖추어 장례를 지내는 국가장을 말한다. 또한 숙종으로부터 정려를 받아 정려각이 세워졌다. 숙종 때 광주시 동구 지원동에 세운 정려각이 한국전쟁 당시 훼손되자 정려각유허비를 세우고 충민사 내에 정려각을 복원했다. 전상의 장군은 광해군을 끝까지 지키고 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묘호란의 희생자에 비해 홀대를 받는 굴욕을 당했다.
1985년 무등산 자락에 충민사를 준공하여 전상의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활과 칼을 비롯해 전경환이 보낸 유물을 전시했다. 하지만 광주 시민들로부터 학살자 전두환과 전경환이 가문을 빛내기 위해 전상의를 추모하는 시설을 건립한다는 오해까지 받았다. 전상의는 천안(天安) 전씨이고 전두환은 완산(完山) 전씨로 밝혀져서 인척관계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고 전경환의 공덕비는 파손됐다. 구성군 전상의를 기리기 위해 광주고 앞에서 월산동 로터리까지 도로를 구성로(龜城路)로 명명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전상의 장군은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국민을 학살한 전두환 때문에 또 한 번 굴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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