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전라도]이순신과 나대용 그리고 조선을 구한 ‘거북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하고 무사들의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정벌과 대륙침략을 추진했다. 나고야에 조선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를 건설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에게 조선 국왕의 입조를 요구하자 소 요시토시는 일본으로 조선통신사 파견을 제안했다. 1590년 조선통신사는 일본에 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고 돌아왔다.
서인 소속의 정사 황윤길은 ‘도요토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으며 반드시 침범이 있을 것입니다’며 일본의 침략을 예견했다. 동인 소속의 부사 김성일은 ‘도요토미는 두려워할 인물이 못 되며 전쟁은 없을 것입니다’며 일본의 침략을 부정했다. 누구는 정사 황윤길의 말이 옳다고 하였고 누구는 부사 김성일의 말이 옳다고 하면서 자당의 통신사를 비호했다.
나대용, 이순신으로부터 감조군관으로 임명
정2품 병조판서 이이는 '6조계'와 ‘십만양병설’을 주장하며 전쟁을 준비했다. 선조는 경상감사 김수, 전라감사 이광, 충청감사 윤석각 등을 통해 성곽을 보수하고 군비를 확충했다. 또한 원균을 경상우수사로, 박홍을 경상좌수사로, 이억기를 전라우수사로 임명했다. 특히 1품 좌의정 유성룡은 이순신을 선조에게 천거하고 종6품 정읍현감에서 정3품 전라좌수사로 승진시켜 나대용과 더불어 거북선을 준비했다.
나대용(羅大用)은 전라도 나주 출신의 무관이자 수군장이다. 28세에 훈련원 별시에 급제하여 종8품 훈련원봉사로 벼슬을 하였다. 1591년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으로부터 전선을 건조하는 감조군관으로 임명을 받고 여수 선소에서 거북선 3척을 진수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천해전에 직접 거북선을 타고 출전하여 대승을 이끌었으나 부상을 당했다.
거북선, 사천해전부터 칠천량해전까지 출전
나대용은 한산도대첩에서 다시 부상을 당했고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에 참전했다. ‘분발하여 몸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죽을힘을 다해 싸웠으니 나대용의 공이 가장 으뜸’이라고 이순신 장군은 나대용을 극찬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종5품인 남해현령에 제수됐고 다시 경기도 수군을 총괄하는 정3품 교동수사에 제수됐으나 사천해전과 한산도대첩에서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거북선은 판옥선(板屋船) 앞에 충각을 달고 사방에 포문을 설치했고 지붕을 덧씌워 쇠못을 박아 침입을 막은 독특한 구조이다. 판옥선은 망루를 올린 평저선에 총통과 신기전을 탑재한 전함을 말한다. 나대용이 이순신의 지시로 태종 때 만들어진 귀선(龜船)을 참조하여 왜군의 조총과 백병전을 피하기 위해 만든 돌격선이다.
조선의 수군은 임진왜란 직전 본영거북선, 방답거북선, 순천거북선 등 3척의 거북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거북선은 사천해전에서 처음으로 출전했고 당포해전, 한산도대첩에서 학익진으로 임진왜란 당시 최고의 승리를 이끌었다. 원균이 이끈 칠천량해전에서 거북선은 모두 침몰됐다.
조선은 남왜북호(南倭北胡)의 침입에 대처하였지만 전쟁을 막지 못했다.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등이 선봉장으로 침입하자 호남을 제외하고 경상도와 충청도는 물론 한양에 이어 평양까지 함락됐다. 조헌, 고경명, 김덕령, 곽재우, 휴정, 유정 등이 의병을 일으켜서 후방을 교란하고 이순신이 바다에서 승리했다. 조명연합군이 평양과 한양을 탈환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왜군은 일본으로 물러갔다. 이순신과 나대용을 비롯한 수많은 관군과 의병들이 목숨을 바쳐 조국을 지켜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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