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환의 역사이야기 / 붕당특집 / 10 영조의 탕평책)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는 후사를 낳지 못했다 후궁 정빈이씨가 효장세자를 낳았고 후궁 영빈이씨가 사도세자를 낳았다 후궁 귀인조씨와 숙의문씨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
영조가 후궁 정빈이씨와 사이에 낳은 효장세자는 9세에 사망하고 7년 만에 영조의 나이 40세에 영빈이씨가 사도세자를 낳았다 사도세자는 생후 1년 만에 원자(元子)에 이어 세자(世子)로 책봉됐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3세에 소학과 효경을 읽었다
사도세자는 10세에 홍봉한의 딸과 혜경궁 홍씨와 혼인했다 영조는 무수리 출신의 컴플렉스 때문에 영조에게 엄하게 학문을 강요했다 결국 사도세자는 영조가 두렵고 무서워 광증(狂症)으로 표출됐다 15세에 의소세손을 낳았으나 3세에 요절했다
사도세자가 17세에 둘째 아들 정조를 낳았고 영조가 병석에 눕자 대리청정(廳政)을 시작했다 사도세자가 노론과 소론의 탕평책을 펼치자 노론은 경계했고 소론은 지지했다 영조의 사도세자에 대한 미움을 극에 치닫았다
사도세자는 김상로 홍계희 문성국 김한구 김귀주 등 노론을 비롯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영조의 후궁 숙의문씨, 영조의 딸 화완옹주 등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심지어 혜경궁 홍씨도 사도세자를 공격하자 정신분열증까지 겪게 되었다
사도세자는 창덕궁에서 자살을 시도했고 평양까지 다녀왔다 자신의 후궁이자 은전군의 생모인 경빈박씨를 살해했다 나경언(羅景彦)이 사도세자의 비행 10여 조를 영조에게 고변했다 영조는 나경언을 처형하고 사도세자를 극심하게 증오했다
영조는 세자를 폐위하고 서인으로 강등하고 뒤주 속에 가두었다 영조는 세자의 스승을 유배보내고 평양을 함께 다녀온 신하들을 처형했다 사도세자가 27세에 뒤주에서 갇혀 죽자 폐세자에서 세자로 복위하고 시호 사도(思悼)를 내렸다
노론은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과 영조를 지지하는 노론으로 대립했다 영조가 즉위하여 노론일색이 되었다 청나라 문물을 받아 들이고 상공업을 중시하는 실학자인 북학파가 출현했다 북학파는 성리학을 배격하여 이용후생학파 중상학파라고 한다
사도세자가 살해되고 정조가 즉위하며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일성했다 사도세자의 추숭에 찬성하면서 정조의 정책에 찬성하는 시파와 사도세자의 추숭에 반대하면서 정조의 정책에 반대하는 벽파로 분화됐다
정조는 즉위하여 아버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존호를 올렸다 하지만 아버지의 묘소를 수원 현릉원으로 옮겼으나 왕으로 촌존은 노론의 반대로 무산됐다 고종 때 사도세자는 추존황제 장조(莊祖)로 추존됐다
노론 벽파는 김종수 심지환 김노경 등 사도세자의 추숭에 반대하면서 정조의 정책에 반대한 정파이다 노론 시파는 홍국영 체제공 김조순 등 사도세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정조의 왕권강화를 지지한 정파이다
남태제는 영조의 신임을 받아 병조판서 대사성 대사헌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시파와 벽파의 논쟁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여 오히려 유배됐고 관직 생활 50년 동안 파당적인 논쟁에 휩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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