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환 박사의 역사야톡 10 / 책을 펴내며>
서일환 언론학박사·행복한요양병원 본부장
한고조 유방(漢高祖 劉邦)은 초패왕 항우(楚覇王 項羽)와 연합하여 진(秦)나라를 멸망시켰고 초한전쟁(楚漢戦争)에서 승리하여 한(漢)나라를 건국했다. 한고조는 한-흉노 전쟁(漢-匈奴 戰爭)에서 패배하여 겨우 목숨을 구걸하고 굴욕적인 화친을 맺고 흉노제국(匈奴帝國) 묵돌선우(冒頓単于)의 동생이 되었다. 한무제가 즉위하여 화친을 파기하고 흉노를 공격했다. 한나라 이릉(李陵) 장군은 5천 명의 보병을 거느리고 8만 명의 흉노 기병과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배했다.
사마천(司馬遷)은 이릉을 변호하다가 한무제로부터 사형이 선고되자 사형대신 치욕적인 궁형을 받고 목숨을 유지했다.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백아(伯牙)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행동하고,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하여 단장합니다.> 라며 자결을 요구하던 친구 임안(任安)에게 궁형을 선택한 이유를 밝혔다.
한무제가 이릉의 가족을 모조리 처형하자 이릉은 '나는 이미 오랑캐의 옷을 입고 있다.'면서 저제후선우(且鞮侯單于)의 사위가 되었다. 한나라 소무(蘇武)는 한무제의 사신으로 흉노에 파견되어 저제후선우 시해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됐다. 소무는 투항을 거부하여 바이칼호로 유배되어 들쥐를 잡아먹고 풀뿌리를 캐먹으며 목숨을 유지했다. 한소제가 즉위하여 흉노와 화친하여 소무는 19년 만에 풀려나서 충신의 상징이 되었고 이릉은 반역자로 낙인찍혀 흉노 땅에서 죽었다.
흉노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는 한나라에 항복하고 한원제의 사위가 되기를 청했다. 한원제는 궁녀 왕소군(王昭君)을 호한야선우의 후궁으로 보냈다. 왕소군은 호한야선우와 아들 복주류약제선우(復株絫若鞮單于)을 낳았고 흉노의 풍습에 따라 남편이 사망하자 아들 복주류약제선우와 혼인하여 딸을 낳았다. 당나라의 시인 동방규(東方虬)는 '오랑캐 땅에는 꽃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라며 '소군원(昭君怨)'을 남겼다.
불혹(不惑)을 지나 지천명(知天命)을 향해 달려가던 어느 날부터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해 글을 썼다. 이사한 날도, 허리 수술한 날도, 어머님이 임종한 날도, 비가오나 눈이오나 하루도 쉬지 않고 글을썼다. 그리고 1년에 한 권씩 역사야톡을 출간했다. 그리고 오늘 10번째 역사야톡을 출간한다. 칭찬도 많이 받았고 질책도 많이 받았다. 역사야톡이 거대한 사막에 한 줌의 모래가 되었으면 한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虎死遺皮 人死遺名)'라고 하였다. 호랑이 가죽을 탐하는 인간의 탐욕으로 수많은 호랑이들이 사라졌다. 인간에게 붙잡혀 목숨을 잃고 가죽마저 벗겨져 박제되어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호랑이는 견디기 힘든 고통일 것이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에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해 <서일환 박사의 역사야톡 10>을 출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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