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환의 역사이야기 / 대마도 특집 / 7 조선통신사)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명분으로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대마도 도주(島主) 소 요시토시(宗義智)의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왜군의 선봉장이 되어 조선에 최초로 상륙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망하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에도 바쿠후(江戸幕府)를 개창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대마도 도주(島主) 소 요시토시(宗義智)에게 조선과 강화교섭을 명령했다
조선의 선조는 일본의 바쿠후의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일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임진왜란 중 조선왕릉 도굴범과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석방 그리고 공식으로 사과하는 국서를 먼저 보낼 것을 요청했다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는 에도 바쿠후의 직인을 도용하여 조작한 국서와 함께 잡범 두 명을 도굴범으로 조선에 보냈다 조선에서 사명당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포로를 송환했다 조선과 일본은 기유약조(己酉約條)를 맺고 국교를 정상화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은 국교가 정상화 되자 통신사를 상호 파견했다 일본 사신은 일본 텐노의 친서를 서울 입경은 허락되지 않아 동래의 왜관에서 조선의 종2품 예조참판과 종3품 예조참의에 보고하고 돌아갔다
1636년부터 1811년까지 조선은 일본에 12회, 일본은 조선에 60회 통신사를 파견하며 250년 동안 서로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우호관계가 유지됐다 조선은 에도 바쿠후의 새로운 쇼군이 취임할 때 바쿠후의 요청으로 통신사를 파견했다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는 조선이 에도 바쿠후에 파견한 대규모 사절단이다 300명에서 500명까지 조선통신사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일본은 1,400척의 배와 1만여 명의 인원이 동원됐다 한양에서 에도까지 왕복하는 데 6개월에서 1년이 소용됐다
조선통신사는 창덕궁에서 출발하여 부산에서 대마도와 이키섬을 지나 후쿠오카현 야마구치현 히로시마현 오카야마현 효고현 오사카부 교토부 시가현 기후현 아이치현 시즈오카현 가나가와현을 지나 도쿄도에 도착했다
일본은 조선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100만 냥을 지출했다 에도 바쿠후의 1년 수입은 80만 냥에 불과했다 조선통신사가 지나가는 번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막대한 비용을 지출했다 조선통신사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통신사 교환으로 조선은 인삼 호피 시문 등을 전했고 일본은 고추 고구마 부채 등을 전했다 1811년 경제적인 부담으로 인해 대마도에서 조선과 일본의 국서를 교환하는 역지통신(易地通信)가 거행되어 마지막 통신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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