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환의 역사이야기 / 이승만 특집 10 / 발췌개헌)
1950년 5월 30일 제2대 총선에서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민주국민당과 대한국민당에 이어 3당으로 전락했다 국회에서 선출하는 차기 제2대 대선에서 이승만은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게 되었다
1951년 3월 14일 이승만이 제출한 내각제개헌안 국회에서 부결됐다 1951년 8월 15일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를 피력했다 1951년 12월 17일 이승만은 자유당을 창당하여 총재가 되었다
1951년 5월 9일 초대 부통령 이시영이 이승만의 국민방위군 사건에 실망하며 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5월 17일 2대 부통령에 김성수가 당선됐다 1952년 5월 25일 이승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야당 의원을 탄압하는 부산 정치파동을 일으켰다
1952년 5월 29일 부통령 김성수는 이승만이 부산 정치파동을 자행하자 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7월 4일 군경을 동원하여 국회의사당을 포위하고 발췌개헌안을 통과했다 8월 5일 2대 대통령에 자유당 이승만, 3대 부통령에 무소속 함태영이 당선됐다
1951년 9월 8일 일본과 연합국 48개국 사이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어 연합군에 의한 일본의 군정통치가 끝나고 일본의 주권이 회복됐다 남한과 북한은 교전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초대받지 못했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미국과 중국, 북한이 휴전협정에 서명했고 남한은 초대받지 못했다 휴전(armistice)은 국제법상 전쟁원인의 해결에 합의는 하지 않았지만 전쟁을 중단하는 것이다 이승만은 휴전에 반대하며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휴전협정이 발효되자 육상의 군사분계선(MDL)은 합의했으나 해상의 경계선은 확정하지 않고 1950년 6월 24일 이전을 기준으로 한다고 명시했다 하지만 이승만이 협정을 무시하고 북한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
UN군 마크 웨인 클라크 총사령관은 남북 간의 군사적 충돌을 억제할 목적으로 북방한계선(北方限界線, NLL)을 설정하여 대한민국 해군에 전달했다 NLL은 대한민국 해군이 더 이상 북상을 하지 못하도록 UN군이 설정한 작전 금지선이다
1954년 5월 20일부터 1955년 12월 8일까지 7차에 걸쳐 이승만은 대처승을 축출하는 불교정화 운동을 일으켰다 이승만은 친일 기독교 세력을 보호하기 위해 희생양으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결혼했던 대처승을 친일파로 규정하고 탄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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