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환의 역사이야기 / 이승만 특집 19 / 현리전투와 유재흥)
유재흥(劉載興)은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에서 일본군 육군 장교 유승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선으로 돌아와서 신의주고등 보통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 소위로 임관하여 대위로 승진했다
유재흥은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육군 대위로 임관했다 육군 초대 제6사단장으로 승진하여 대령으로 진급했다 제주도지구 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제주4·3항쟁을 진압 공로로 28세의 나이로 준장으로 진급했다
유재흥은 한국전쟁 직전에 육군 제7사단장으로 보임되어 동두천전투 의정부방어전 창동전투 등에 참가했다 북한군은 3사단과 4사단의 공격을 막지 못해 제7사단이 궤멸됐다 의정부 축선이 붕괴되어 서울이 함락하게 되었다
유재흥은 1950년 7월 육군 제2군단장으로 임명되어 소장으로 진급했다 영천전투에서 승리하여 낙동강 방어선 붕괴 위기를 막았다 제2군단의 7사단 평양진입과 6사단 최초 압록강 변에 성공했다 유재흥은 10월 24일 육군참모차장으로 영전됐다
유재흥은 10월 26일 다시 제2군단장으로 임명되어 청천강전투에서 중공군 38군과 42군에 포위되어 6사단, 7사단, 8사단이 괴멸적 타격을 입고 제2군단이 해체됐다 청천강전투에서 패배하여 유엔군은 청천강 이남으로 철수했다
유재흥은 1951년 3월 육군 제3군단장으로 전임됐다 1951년 5월 16일 강원도 인제군 현리지구에서 중공군 제9병단에 제3군단 전체가 포위됐다 유재흥은 경비행기 타고 도주하여 병력의 30%와 중장비의 70%를 잃는 괴멸적 타격을 입었다
미8군 밴 플리트 사령관은 제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 사령부를 해체하고 일체의 작전지휘권을 미군에게 부여했다 1950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군에게 전작권을 양도했다
유재흥은 1951년 5월 25일 육군참모차장으로 전임되어 정전회담에 남한측 옵서버로 참관했다 휴전 이후 국방부 연합참모총장, 육군 제1군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자 정군 대상으로 지목되어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제3공화국의 박정희 정권에 등용되어 태국대사 스웨덴대사 이탈리아대사에 이어 국방부 장관에 임명됐다 퇴임 후 대한석유공사 사장, 석유화학 공업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고 사망했다 유재흥은 아버지 유승렬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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