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환의 역사이야기 / 여성특집 / 10 길상사의 '김영한')
김영한은 함경도 함흥의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으로 16세에 기생이 되었다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했다 독립운동가 신윤국의 도움을 받아 일본 유학을 떠났다 신윤국이 투옥되자 함흥으로 돌아왔다
신윤국은 황해도 연백 출신으로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에 참여했고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동우회 사건'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됐다 해방이 되자 제헌 국회의원이 되었고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오늘부터 당신은 영원한 내 여자야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전까지 우리에게 이별은 없어> 백석은 함흥에서 김영한에게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주며 사랑을 고백했다 집안에서 기생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하자 백석은 만주로 떠났다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 눈은 푹푹 날리고 /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燒酒)를 마신다> 백석이 만주에서 김영한을 생각하며 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시의 일부이다
김영한은 백석이 떠난 아픔을 잊기 위해 요정 대원각을 운영하며 갑부가 되었다 해방이 되자 백석은 함흥으로 돌아왔고 김영한은 서울로 돌아갔다 그리고 영영 이별을 하였다
백석은 평북 정주 출신으로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아오야마학원을 졸업했다 함흥 영생고보 교사로 지내다가 만주로 망명했다 해방이 되자 북한으로 돌아와서 김일성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남한에서 오랫동안 금기의 인물이 되었다
1987년 월북 작가 백석이 해금되자 2억 원을 출연하여 백석문학상을 제정했다 '내 사랑 백석'과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은 이름'을 출간했다 평생 동안 백석을 생각하며 독신으로 살다가 1,000억 원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여 길상사를 건립했다
<1,000억 재산이 그 사람 시 한 줄만도 못해. 내가 죽으면 화장해 길상사에 눈 많이 내리는 날 뿌려 줘>라고 유언하고 성불했다 길상사는 백석과 김영한의 아름다운 사랑과 함께 법정 스님의 무소유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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