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환의 역사이야기 / 여성특집 / 15 울지 말아요 ‘왕수복’)
왕수복(王壽福)은 평남 강동 출신으로 명륜여자보통학교를 중퇴했다 11세에 평양 권번이 되었고 16세에 전통적 가락의 ‘울지 말아요’로 취입하여 가수가 되었다 최초의 민요조 가수이자 최초의 기생출신 가수로서 '유행가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고도(孤島)의 정한(情恨)’과 ‘인생의 봄’은 120만 장이나 팔렸다 인기 최정상에 올랐지만 기생이란 꼬리표가 고통스럽게 하였다 결국 일본으로 건너가서 서양 음악을 공부하여 조선 민요를 서양 창법으로 불렀다
24세의 왕수복은 일제가 조선민요를 일본어로 부르라고 강요하자 단호하게 음악계를 은퇴하고 고뇌했다 34세의 이효석은 ‘메밀꽃 필 무렵’을 쓰고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상처하고 유아마저 잃고 극심한 실의에 빠졌다
도쿄에서 왕수복은 이효석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이효석은 ‘태양이 그대를 버리지 않는 한 나는 그대를 버리지 않겠노라’고 답했다 왕수복의 사랑은 ‘메밀꽃 필 무렵’의 이효석의 요절로 끝이 났다
친일파 여류시인이던 노천명은 보성전문학교 교수이던 김광진을 보고 첫눈에 반하여 청혼했다 하지만 김광진은 노천명을 거절하고 왕수복과 결혼했다 왕수복은 해방이 되자 김광진과 함께 월북하여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다
<아리랑 넘는 길 몇 만리던가 가며는 오지도 못하는가요 아리랑 스리랑 마음이 변해서 소식 없나요 아리아리 얼싸 스리스리 얼싸 아리랑 고개는 님 가신 고개> 왕수복의 ‘봄맞이 아리랑’이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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