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전라도]조선을 구한 의병장 ‘고경명’
서일환<상무힐링재활병원 행정원장>
고경명(高敬命)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전라도 광주 압천보에서 정3품 대사간을 역임한 고맹영(高孟英)과 남평서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고운(高雲)은 정6품 형조좌랑을 역임하다가 기묘사화로 관작이 삭탈돼 고향으로 낙향했다. 고경명은 남평현감 백인걸(白仁傑)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백인걸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대사성, 대사헌, 우참찬 등을 역임했고 청백리로 녹선됐다.
고경명은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하고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호당(湖堂)에 들어 사가독서를 받았고 평안도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민정을 시찰했다. 명종의 외삼촌인 외척 이량의 전횡을 고발하였으나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울산 군수로 좌천됐고 영암 군수로 복직했다. 종계변무의 서장관으로 베이징에 다녀와서 광국원종공신에 책록됐다. 건저문제로 정철이 파직되자 함께 사직하여 광주로 낙향했다. 고경명은 임억령, 김성원, 정철과 더불어 신선으로 자처하며 은둔하여 ‘식영정 4선(四仙)’으로 불렸다.
▲말을 타고 마상격문으로 의병 모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한양이 함락되고 선조가 의주로 몽진하자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과 광주목사 권율이 이끄는 관군이 왜군에게 용인에서 참패하자 고경명은 60세의 나이로 마상격문(馬上檄文)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됐다. 고경명이 말을 타고 가면서 지었다는 ‘마상격문’은 제갈량의 ‘출사표’와 최치원의 ‘토황소격문’과 더불어 3대 격문이라고 일컬어진다.
의병장 고경명은 의병장 조헌(趙憲), 승병장 영규(靈圭) 등과 함께 충청도 금산에서 고바야카와(小早隆景)가 이끄는 왜군과 맞서 싸웠다. 1차 금산전투에서 의병장 고경명을 비롯해 차남 고인후, 유팽로, 안영 등이 전사했다. 2차 금산전투에서 의병장 조헌, 영규를 비롯한 700여 명의 의병들이 전사했다. 박정량(朴廷亮)이 순국한 의병들의 유골을 합장하여 ‘칠백의총(七百義塚)’을 만들었다. 선조는 왕명으로 순국한 고경명에게 정2품 예조판서 겸 양관 대제학으로 추증했다. 고경명의 장남 고종후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천일, 최경회, 황진 등과 함께 촉석루에서 순절했다.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3부자와 유팽로 안영을 배양하기 위해 사당을 건립하여 선조로부터 ‘포충(褒忠)’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포충사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장성의 필암서원, 정읍의 무성서원과 함께 헐리지 않았던 호남지역 3대 서원 중 하나이다. 필암서원은 해동18현 중의 한 사람인 하서 김인후를 기리는 서원이며, 무성서원은 신라 말의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을 기리는 서원이다. 필암서원과 무성서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를 신청했다.
▲광주 제봉로, 고경명의 호에서 유래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고경명 3부자가 임금의 교지에 의해 불천위로 모셔졌다. 불천위(不遷位)는 국가와 백성을 위해 큰 공훈을 남기고 죽은 사람의 신주를 5대봉사가 지난 뒤에도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서 제사를 영원히 지내도록 국가에서 지정하는 것이다. 또한 고경명의 후손들이 포충사에 봉이와 귀인을 기리기 위해 충노비(忠奴碑)를 세웠다. 봉이와 귀인은 고경명의 노비의 신분으로 금산전투에 참전했고 고종후를 따라 진주성전투에 참전하여 순절했다.
광주시는 의병장 제봉 고경명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광주역부터 남광주역까지 3230m의 거리를 제봉로(霽峰路)라고 명명했다. 충장로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의 시호이고, 금남로는 정묘호란 당시 부원수 금남공 정충신의 군호에서 유래했다. 전라도는 고경명을 비롯해 김덕령, 정충신 등의 높은 뜻을 계승하여 동학동민혁명, 광주학생독립운동, 광주민주화운동 등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언제나 일어선 자랑스러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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