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전라도]친일파 ‘민족시인’ 서정주
서일환<역사 칼럼니스트>
서정주는 동백꽃으로 유명한 천년고찰 선운사 인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2대 부통령을 역임한 친일파 김성수 집안의 마름이었다. 서정주는 14세에 서울로 상경하여 중앙고보 재학 중에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하여 구속되어 퇴학을 당했다. 18세에 성북구 개운산 대원암에서 석전 스님 밑에서 수학했고 동아일보에 시 ‘그 어머니의 부탁’으로 등단했다. 1938년 23세에 ‘애비는 종이었다 ~ 스무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는 ‘자화상’을 남겼다.
1942년 27세의 청년 서정주는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靜雄)로 창씨개명을 하고 태평양전쟁을 찬양했다. 조선의 청년들에게 ‘일본을 위한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 죽는 것은 일본 천왕이 반도인에게 부여한 크나 큰 영광’이라면서 징병과 학병의 참여를 독려하는 시와 평론을 썼다. 1943년 태평양전쟁에 종군기자로 참전했고 일본어로 간행된 친일노선의 문예지 ‘국민문학’과 ‘국민시가’를 편집했다.
▲창씨개명하고 친일행위
서정주는 매일신보 1944년 12월9일자에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 공격대원’이라는 내용의 ‘송정오장 송가’를 기고했다. ‘마쓰이 오장(印在雄)’으로 창씨개명하고 조선에서 최초로 가미가제 특공대로 끌려간 조선청년 인재용을 극찬하는 내용이다.
서정주는 1945년 갓 서른 나이에 해방이 되자 친일행위에 대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다.’면서 ‘친일행위는 했으나 받은 대가가 없었다.’고 변명했다. 또한 반민특위에 끌려가서 ‘적어도 일제 치하에 몇 백 년은 더 있을 줄 알았다. 해방이 그토록 빨리 올 줄은 몰랐다.’고 고백했다. 이승만으로부터 친일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받고 ‘이승만 박사 전기’를 집필했고, 박정희의 5·16 쿠데타와 유신체제를 지지했다.
서정주는 5·18 광주학살로 권력을 탈취한 전두환 대통령 후보의 지지연설과 전두환 대통령 당선 축하연설을 하였다. 1987년 1월 18일 전두환의 56회 생일에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를 올렸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이 직선제 개헌요구를 거부하고 현행 헌법을 유지한다는 4·13 호헌조치를 ’구국의 결단으로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서정주는 전두환을 단군 이래 최고의 미소를 가진 대통령이라고 찬양하고 ‘일해’라는 호까지 진상했다.
▲전두환 독재정권 찬양까지
‘국화 옆에서’의 작가 서정주는 ‘오랑캐꽃’의 작가 이용악, ‘절정의 노래’의 작가 오장환과 함께 한국시단의 3대 천재로 손꼽혔다. 서정주는 친일행위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오장환과 이용악은 월북하여 금기의 인물이 되었다. 생전에 1000여 편의 시를 써서 1941년 첫 번째 시집 ‘화사집’을 시작으로 1988년 자서전적 시집 ‘팔할이 바람’, 1997년 마지막 시집 ‘80 소년 떠돌이의 시’ 등 수많은 시집을 출간했다. 중앙대학교와 동국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고 한국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2000년 12월 24일 친일행위를 반성하지 못하고 사망했고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누구는 ‘서정주는 시로써 평가를 받아야 하지 친일행위로써 평가를 받아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하고 누구는 ‘서정주는 이광수를 능가하고 이완용과 맞먹는 아주 골수 친일파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역사는 ‘친일파 708인 명단’, ‘친일 문학인 42인’,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서정주를 친일파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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