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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전라도]우리나라 3대 민족 인권 변호사 가인 ‘김병로’

역사야톡 2020. 5. 14. 19:58

[역사 속 전라도]우리나라 3대 민족 인권변호사 가인 김병로

 

서일환<역사 칼럼니스트>

 

가인 김병로는 해동18현의 한 사람인 하서 김인후의 15대손이며 1888년 전북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서 정6품 사건원 정언을 역임한 김상희와 장흥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잃고 13세에 혼인을 하였다. 조선 최고, 최후의 유학자로서 추앙받던 간재 전우(田愚)에게 성리학을 배웠고 담양 일신학교에서 서양인 선교사로부터 신학문을 배웠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에 감화되어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의병활동을 하였다.

 

김병로는 창평 창흥학교에 입학하여 유학을 결심하고 도쿄 니혼대학 법학과와 메이지대학 야간부 법학과에 동시에 입학하여 수학했다. 경술국치의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서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서울대법대의 전신인 경성법학전문학교와 경수전수학교, 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와 보성법률상업학교에 출강했다.

 

▲독립 운동가들을 무료로 변호

 

김병로는 3·1운동 직후 판사로 임용되어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원 판사로 활동했다. 1년 만에 판사를 사직하고 독립 운동가를 무료로 변론하는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 여운형과 안창호를 비롯해 흥사단 사건, 6·10 만세운동, 간도 참변, 정의부 사건 등 수많은 독립운동 사건을 변론했다. 또한 이승훈, 김성수, 송진우 등과 함께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펼쳤으나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실패했다.

 

김병로는 이인, 허헌 등과 함께 형사변호 공동연구회를 창설하고 ‘독립운동이 무죄’임을 주장하며 의열단의 김상옥 의사 및 김시현 의사 사건, 신간회 사건, 광주학생 운동 사건 등을 변론했다. 김병로, 이인, 허헌은 일제 강점기 3대 인권변호사로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제국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변호사 정직처분이 내려지자 경기도 양주군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해방이 될 때까지 은둔했다.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조선총독부의 배급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1945년 8월15일 해방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와 한국민주당에 참여하며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및 2대 대법원장에 선임돼 9년 3개월 동안 재직했다. 또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장과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의 특별재판부 재판장을 역임했다. 김병로는 이승만 정권의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권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한국전쟁 직전 한쪽 다리를 절단하자 이승만이 사표를 종용했으나 의족에 의지하고 출근했다.

 

김병로는 이승만이 판결에 항의하자 ‘억울하면 항소하쇼’라는 명언을 남겼다. 1957년 “모든 사법 종사자에게 굶어 죽는 것을 영광이라고 그랬다. 그것은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는 명예롭기 때문이다”라고 대법원장 퇴임식에서 이임사를 남겼다. 이승만의 독재에 저항했고 박정희의 정치참여를 반대했다.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고 이듬해인 1964년 1월13일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손자 김종인, 할아버지와 다른 행보

 

김병로의 차남인 김재열은 큐슈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였다. 김재열이 4세의 어린 아들 김종인을 남겨두고 3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할아버지가 손자인 김종인을 키웠다. 김종인은 박정희의 경제개발계획 자문역할, 전두환의 국보위 자문위원, 노태우의 청와대 경제수석 등을 역임했다. 김종인은 5선 의원이자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박근혜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에 산파역을 담당하였다.

 

김종인은 최근에는 미래통합당 선대대책위원장을 역임하여 21대 총선에서 참패했다. 다시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와 관련하여 찬반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손자 김종인은 ‘부정을 행하기보다 굶어서 죽는 편이 영광이다’던 할아버지 김병로 대법관과 전혀 다르게 보수와 진보를 왔다갔다 하는 갈지 자 정치행보로 국민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으며 조상까지 욕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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