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환의 역사이야기 / 유학 13 왕수인과 양명학)
한나라 때부터 당나라 때까지 유교 경전의 자구를 해석하는 훈고학이 중심이었다 남송 때 유교 경전에 담긴 공자와 맹자의 본래 의미를 왜곡하자 성리학을 완성했다 하지만 성리학은 황제의 권한만 강화하고 백성의 현실을 무시했다
왕수인(王守仁)은 명나라의 정치인이자 사상가이며 양명학의 창시자로 왕양명(王陽明)이라고 부른다 교조화 되어 수양을 게을리 하는 주자학에 환멸감을 느꼈고 주자를 비판하고 양명학(陽明學)을 완성했다
주자는 '앎(知)이 먼저이고 행(行)이 다음이다'면서 '선지후행(先知後行)'을 주장했다 왕수인은 '앎(知)과 행(行)은 일치해야 한다'면서 지행합일론(知行合一論)을 주장했다 왕수인의 사상은 주자를 비판하여 한 동안 사학(邪學)으로 간주됐다
왕수인은 명(明)나라의 11대 황제 가정제(嘉靖帝)로부터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임명됐다 광시(廣西)지방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오던 길에 사망했다 죽은 지 38년 후에 공자묘에 배향됐다
이지(李贄)는 명나라의 유학자이며 이슬람교도이자 왕수인의 양명학을 계승한 양명학자이다 자유분방하여 반유교적(反儒敎的) 언행으로 성리학자들로부터 기행을 한다는 이유로 시달림을 당했고 부패한 관료들의 탄압을 받아 감옥에서 자살했다
양명학은 명나라 왕수인이 창안한 유교의 한 계파이며 유교경전에 대한 이해보다는 개인의 깨달음과 실천을 강조하여 명나라에서 발전했다 양명학을 집대성한 왕수인(王守仁)의 호인 양명(陽明)을 따서 '양명학'이라고 한다
양명학은 효심을 배우고 익혀서 원리를 이해하는 성리학의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을 비판하고 효심과 효행은 구분되지 않는다는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주장했다 양명학은 청나라에서 고증학에 밀려 쇠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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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때부터 당나라 때까지 유교 경전의 자구를 해석하는 훈고학이 중심이었다 남송 때 유교 경전에 담긴 공자와 맹자의 본래 의미를 왜곡하자 성리학을 완성했다 하지만 성리학은 황제의 권한만 강화하고 백성의 현실을 무시했다
왕수인(王守仁)은 명나라의 정치인이자 사상가이며 양명학의 창시자로 왕양명(王陽明)이라고 부른다 교조화 되어 수양을 게을리 하는 주자학에 환멸감을 느꼈고 주자를 비판하고 양명학(陽明學)을 완성했다
주자는 '앎(知)이 먼저이고 행(行)이 다음이다'면서 '선지후행(先知後行)'을 주장했다 왕수인은 '앎(知)과 행(行)은 일치해야 한다'면서 지행합일론(知行合一論)을 주장했다 왕수인의 사상은 주자를 비판하여 한 동안 사학(邪學)으로 간주됐다
왕수인은 명(明)나라의 11대 황제 가정제(嘉靖帝)로부터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임명됐다 광시(廣西)지방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오던 길에 사망했다 죽은 지 38년 후에 공자묘에 배향됐다
이지(李贄)는 명나라의 유학자이며 이슬람교도이자 왕수인의 양명학을 계승한 양명학자이다 자유분방하여 반유교적(反儒敎的) 언행으로 성리학자들로부터 기행을 한다는 이유로 시달림을 당했고 부패한 관료들의 탄압을 받아 감옥에서 자살했다
양명학은 명나라 왕수인이 창안한 유교의 한 계파이며 유교경전에 대한 이해보다는 개인의 깨달음과 실천을 강조하여 명나라에서 발전했다 양명학을 집대성한 왕수인(王守仁)의 호인 양명(陽明)을 따서 '양명학'이라고 한다
양명학은 효심을 배우고 익혀서 원리를 이해하는 성리학의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을 비판하고 효심과 효행은 구분되지 않는다는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주장했다 양명학은 청나라에서 고증학에 밀려 쇠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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