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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전라도] 잊혀진 호남의 의병장 '양윤숙'

역사야톡 2020. 8. 20. 19:56
[역사 속 전라도] 잊혀진 호남의 의병장 '양윤숙'

양윤숙(楊允淑)은 1875년 12월 2일 전북 순창군 구암면 국화리(菊花里)에서 수십 마지기를 경작하던 부농인 아버지 양민석(楊民錫)과 어머니 해주 오씨 사이의 3형제 중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양윤숙의 본명은 춘영(春泳)이나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펼치면서 춘계(春溪), 인영(寅泳), 연영(演泳) 등 여러 이름을 사용했다. 국화리는 마을 앞산이 마치 노란 암탉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황계마을로 개칭됐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면암 최익현과 돈헌 임병찬이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순창에 이르자 양윤숙은 포수 수십 명을 데리고 의병에 합류했다. 최익현이 일본군에 체포되어 대마도에 억류되자 양윤숙은 회문산에 은둔했다. 최익현과 임병찬은 고종 황제가 의병해산 칙서를 내리자 의병을 해산하고 대마도로 유배됐다. 임병찬은 석방되어 귀국했고 최익현은 순국하여 귀국했다.

양윤숙은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순창 회문산(回文山)에서 호남의군부(湖南義軍府)를 조직하여 도총독이 되었다. <비록 무기는 날카롭지 않으나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본의 충신이 된 대한의 난적들을 처단하고 말 것이다>라고 양윤숙은 의격문을 지방의 향교에 돌렸다. 의병 120여 명을 규합하여 좌선봉 최화, 우선봉 임순호, 중군 최산흥, 후군 이국찬 등으로 의병부대를 구성하여 순창, 남원, 임실, 담양, 화순, 곡성 등에서 활동했다.

양윤숙, 회문산에서 호남의군부 조직

양윤숙 의병부대는 1908년 가을부터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했고, 일본군 막사를 기습하여 불태웠고, 일본군 기병대가 거처하는 민가를 방화했다. 1909년 봄에는 일본군 헌병대, 일본군 기마대, 일경 주재소 등을 습격했고, 가을에는 일본군 수비대원을 살해했다. 양윤숙 의병부대의 활약은 임병찬의 돈헌유고(遯軒遺稿),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한국독립운동사, 일본의 재판기록 등에 전해진다.

1909년 겨울에 일본군의 남한대토벌 작전으로 은신했으나 12월 3일 김제군 월산면 봉월리에서 일본군 헌병대에 의해 체포됐다. 양윤숙은 <날으는 봉황이 날개 꺾여도 봉황은 봉황이며 / 엎드린 용이 여의주를 잃어도 용은 용일세 / 너희 나라 큰 충신이 오늘 성사 이뤘건만 / 우리나라 사람 불충하여 오늘의 눈물이라네>라고 전주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유서를 남겼다.

양윤숙은 1910년 3월 9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내란죄와 방화죄로 교수형을 언도받고 4월 14일 전주분감에서 36세의 젊은 나이로 처형됐다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내각고시 49호(관보)에 보도했다. 양윤숙의 유해는 고향 순창군 구암면 국화촌에 안장됐다가 순창군 인계면 도사리 선산으로 이장되어 이정표 하나 없이 쓸쓸하게 묻혀 있다. 양윤숙은 1980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양윤숙, 36세에 형장의 이슬로 순국

양윤택(楊允澤)은 양윤숙의 친동생으로 일본군 헌병대 및 수비대, 경찰 등의 동태를 제공하며 의병 활동을 도왔다. 1909년 12월 3일 체포되어 6월 20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고 1947년 1월 3일에 사망했다. 정부는 양윤택에게 1982년 대통령표창에 이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양윤택의 유해는 2011년에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순창은 노령산맥 동쪽에 위치하며 중앙으로 섬진강이 흐른다. 도선국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강천사가 유명하며 고추장의 대명사로 알려졌다. 항일의병운동의 진원지이자 한국전쟁 당시 남부군 빨치산의 활동 거점이며 한국의 5대 명당으로 알려진 회문산이 있다. 순창은 위정척사운동의 정신적 지주인 기정진, 일제 강점기의 3대 민족 변호사의 한 사람인 김병로 등의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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