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전라도]성리학 6대가 할아버지 기정진과 손자 기우만
서일환 첨단재활 요양병원 본부장·언론학박사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은 1798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양친을 여의고 전남 장성 탁곡(卓谷)으로 이사했다.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종9품 참봉에 임명됐으나 봉직하지 않았다. 종6품 사옹원 주부, 종5품 평안도 도사, 정4품 사헌부 장령 등에 제수됐으나 모두 사양했다.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임술의책(壬戌擬策)을 작성하여 폐단을 지적했다.
기정진은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에 기초하여 육조소(六條疏)를 올렸다. 정3품 동부승지, 종2품 호조참판 등에 제수됐으나 모두 사양했다. 다시 국가적 폐습을 비판하고 방책을 제시하는 삼무사(三無私)를 올리고 고향 장성으로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했다.
기정진은 서경덕, 이황, 이이, 이진상, 임성주 등과 함께 성리학의 6대가로 꼽힌다.
기정진은 주돈이(周敦?)와 주희(朱熹)의 성리학을 연구하여 이일분수(理一分殊)의 독창적인 철학을 주장하여 이항로(李恒老)와 함께 위정척사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기정진의 위정척사 사상은 김석구, 정재규, 정의림, 기삼연 등에게 전수됐고 손자 기우만이 가학(家學)을 이어받았다. 1879년 기정진이 사망하자 기우만이 호남 유림의 종장으로 추대됐다.
기정진, 위정척사운동의 정신적 지주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은 1846년 전남 장성 탁곡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기정진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참봉의 신분으로 폐단의 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렸다.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유생들이 동학에 가담한 것을 수치로 여기고 동학당 토평비문을 지었다.
기우만은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을미소(乙未疏)를 올렸다. 기우만은 의병장 유인석(柳麟錫)의 격문이 내려오자 고광순, 기삼연, 김익중 등과 의병들을 규합하여 호남대의 소장(湖南大義 所將)에 추대됐다. 고종의 어명으로 파견된 선유사 신기선(申箕善)의 의병해산 명령을 받고 의병을 해산했다. 다시 의병을 일으켜서 왜군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르고 석방됐다.
기우만은 을사오적 암살을 사주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됐다가 석방됐고 고종이 퇴위하자 은둔하여 ‘호남 의병장 열전(湖南 義兵將 列傳)’을 집필했다. 1916년 ‘내 나이가 80을 바라보니 죽는 것은 한이 없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원수가 소멸되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라고 유언을 남기고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기우만, 항일의병으로 활동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은 1851년 전남 장성 탁곡에서 태어났다. 재종숙(再從叔)인 기정진으로부터 글을 배웠고 삼종질(三從姪)인 기우만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기삼연은 '호남창의 회맹소(湖南倡義 會盟所)'의 대장으로 추대되어 장성, 영광, 고창 등지에서 '백마장군(白馬將軍)'이라 불렸다. 일제에 체포되어 57세에 총살당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의재(毅齋) 기산도(奇山度)는 1869년 전남 장성 탁곡에서 태어났다. 의병장 기삼연의 재종손(再從孫)이며 의병장 고광순의 사위이다. 을사5적의 하나인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을 처단하려다가 투옥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전라남북도 의무금요구 특별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일제에 체포되어 반신불수가 되어 51세에 사망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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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환 첨단재활 요양병원 본부장·언론학박사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은 1798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양친을 여의고 전남 장성 탁곡(卓谷)으로 이사했다.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종9품 참봉에 임명됐으나 봉직하지 않았다. 종6품 사옹원 주부, 종5품 평안도 도사, 정4품 사헌부 장령 등에 제수됐으나 모두 사양했다.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임술의책(壬戌擬策)을 작성하여 폐단을 지적했다.
기정진은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에 기초하여 육조소(六條疏)를 올렸다. 정3품 동부승지, 종2품 호조참판 등에 제수됐으나 모두 사양했다. 다시 국가적 폐습을 비판하고 방책을 제시하는 삼무사(三無私)를 올리고 고향 장성으로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했다.
기정진은 서경덕, 이황, 이이, 이진상, 임성주 등과 함께 성리학의 6대가로 꼽힌다.
기정진은 주돈이(周敦?)와 주희(朱熹)의 성리학을 연구하여 이일분수(理一分殊)의 독창적인 철학을 주장하여 이항로(李恒老)와 함께 위정척사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기정진의 위정척사 사상은 김석구, 정재규, 정의림, 기삼연 등에게 전수됐고 손자 기우만이 가학(家學)을 이어받았다. 1879년 기정진이 사망하자 기우만이 호남 유림의 종장으로 추대됐다.
기정진, 위정척사운동의 정신적 지주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은 1846년 전남 장성 탁곡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기정진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참봉의 신분으로 폐단의 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렸다.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유생들이 동학에 가담한 것을 수치로 여기고 동학당 토평비문을 지었다.
기우만은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을미소(乙未疏)를 올렸다. 기우만은 의병장 유인석(柳麟錫)의 격문이 내려오자 고광순, 기삼연, 김익중 등과 의병들을 규합하여 호남대의 소장(湖南大義 所將)에 추대됐다. 고종의 어명으로 파견된 선유사 신기선(申箕善)의 의병해산 명령을 받고 의병을 해산했다. 다시 의병을 일으켜서 왜군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르고 석방됐다.
기우만은 을사오적 암살을 사주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됐다가 석방됐고 고종이 퇴위하자 은둔하여 ‘호남 의병장 열전(湖南 義兵將 列傳)’을 집필했다. 1916년 ‘내 나이가 80을 바라보니 죽는 것은 한이 없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원수가 소멸되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라고 유언을 남기고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기우만, 항일의병으로 활동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은 1851년 전남 장성 탁곡에서 태어났다. 재종숙(再從叔)인 기정진으로부터 글을 배웠고 삼종질(三從姪)인 기우만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기삼연은 '호남창의 회맹소(湖南倡義 會盟所)'의 대장으로 추대되어 장성, 영광, 고창 등지에서 '백마장군(白馬將軍)'이라 불렸다. 일제에 체포되어 57세에 총살당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의재(毅齋) 기산도(奇山度)는 1869년 전남 장성 탁곡에서 태어났다. 의병장 기삼연의 재종손(再從孫)이며 의병장 고광순의 사위이다. 을사5적의 하나인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을 처단하려다가 투옥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전라남북도 의무금요구 특별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일제에 체포되어 반신불수가 되어 51세에 사망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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