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전라도]충, 효, 열, 절의 양씨삼강문(梁氏三綱門)
서일환 언론학박사·첨단재활요양병원 본부장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은 전라도 능성현 달아실(月谷) 마을에서 양이하(梁以河)의 아들로 태어났다. 능성현은 현재 화순군 능주면이고 달아실은 달이 비추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청백리에 녹선된 송흠(宋欽)의 문하에서 학문했고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했다. 다시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6품 수찬, 정5품 교리를 역임했고 현량과(賢良科)에 발탁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19년 남곤, 심정, 홍경주 등 훈구파가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서 개혁정책을 펼치던 조광조, 김식, 김정 등 사림파를 탄압했다. 양팽손은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의 억울함을 항소하다 관직이 삭탈되자 고향인 능성현 쌍봉(雙峰) 마을에 학포당(學圃堂)을 짓고 독서를 하며 은둔하면서 후학을 양성했다.
양팽손은 능성현으로 유배 온 조광조를 날마다 찾아가 경론을 하였다.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사사되자 몰래 시신을 옮겨 가묘를 만들었고 다시 경기도 용인으로 이장했다. 척신 김안로(金安老)가 사사되고 종5품 용담현령에 제수되자 곧바로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은둔했다.
기묘명현 양팽손, 아들 양응정, 손자 양산숙
양팽손은 사후에 정2품 이조판서에 추증됐고 전라도 능성현의 죽수서원(竹樹書院)에 조광조와 함께 배향됐다. 양팽손은 사망한 지 300년이 지나서 혜강(惠康)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화순군 화순읍 대리교차로부터 능주면, 한천면, 춘양면, 청풍면, 이양면 쌍봉교차로까지 이어지는 도로를 양팽손의 호를 따서 학포로라고 한다.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은 양팽손의 아들이자 정3품 예조 참의를 역임한 양응태(梁應台)의 아우이며 의병장 양산숙(梁山璹)의 부친이다. 생원시에 이어 중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선조 때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뽑혔으며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정3품 대사성을 역임했고 종2품 공조 참판에 추증됐다.
충민(忠愍) 양산숙(梁山璹)은 양팽손의 손자이자 양응정의 아들이다. 성혼의 문하에서 수업했고 평생을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념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휘하에서 싸우다가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하여 목숨을 바쳤다.
양씨 일가 7인을 기리기 위해 정려문 세워
임진왜란 중에 왜군을 만나자 양산숙의 어머니인 죽산박씨를 비롯해 양산숙의 부인인 광산이씨, 형인 양산룡, 동생인 양산수, 누이이자 김광운의 처인 제주양씨 등이 정조를 지키기 위해 바다에 투신했다. 인조는 7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양씨삼강문(梁氏三綱門)을 세웠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에 소재하는 양씨삼강문은 양산숙과 그 가족 6명 등 7인의 충(忠), 효(孝), 열(熱), 절(節)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문(旌閭門)이다. 정려문은 충신, 효자, 효부,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마을 입구나 대문 앞에 지은 붉은 칠을 한 문으로 홍살문, 정문 등으로 부른다.
#서일환의역사야톡 #서일환의역사이야기 #역사속전라도 #양팽손 #양응정 #양산숙 #양씨삼강문 #광주드림
서일환 언론학박사·첨단재활요양병원 본부장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은 전라도 능성현 달아실(月谷) 마을에서 양이하(梁以河)의 아들로 태어났다. 능성현은 현재 화순군 능주면이고 달아실은 달이 비추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청백리에 녹선된 송흠(宋欽)의 문하에서 학문했고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했다. 다시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6품 수찬, 정5품 교리를 역임했고 현량과(賢良科)에 발탁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19년 남곤, 심정, 홍경주 등 훈구파가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서 개혁정책을 펼치던 조광조, 김식, 김정 등 사림파를 탄압했다. 양팽손은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의 억울함을 항소하다 관직이 삭탈되자 고향인 능성현 쌍봉(雙峰) 마을에 학포당(學圃堂)을 짓고 독서를 하며 은둔하면서 후학을 양성했다.
양팽손은 능성현으로 유배 온 조광조를 날마다 찾아가 경론을 하였다.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사사되자 몰래 시신을 옮겨 가묘를 만들었고 다시 경기도 용인으로 이장했다. 척신 김안로(金安老)가 사사되고 종5품 용담현령에 제수되자 곧바로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은둔했다.
기묘명현 양팽손, 아들 양응정, 손자 양산숙
양팽손은 사후에 정2품 이조판서에 추증됐고 전라도 능성현의 죽수서원(竹樹書院)에 조광조와 함께 배향됐다. 양팽손은 사망한 지 300년이 지나서 혜강(惠康)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화순군 화순읍 대리교차로부터 능주면, 한천면, 춘양면, 청풍면, 이양면 쌍봉교차로까지 이어지는 도로를 양팽손의 호를 따서 학포로라고 한다.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은 양팽손의 아들이자 정3품 예조 참의를 역임한 양응태(梁應台)의 아우이며 의병장 양산숙(梁山璹)의 부친이다. 생원시에 이어 중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선조 때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뽑혔으며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정3품 대사성을 역임했고 종2품 공조 참판에 추증됐다.
충민(忠愍) 양산숙(梁山璹)은 양팽손의 손자이자 양응정의 아들이다. 성혼의 문하에서 수업했고 평생을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념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휘하에서 싸우다가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하여 목숨을 바쳤다.
양씨 일가 7인을 기리기 위해 정려문 세워
임진왜란 중에 왜군을 만나자 양산숙의 어머니인 죽산박씨를 비롯해 양산숙의 부인인 광산이씨, 형인 양산룡, 동생인 양산수, 누이이자 김광운의 처인 제주양씨 등이 정조를 지키기 위해 바다에 투신했다. 인조는 7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양씨삼강문(梁氏三綱門)을 세웠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에 소재하는 양씨삼강문은 양산숙과 그 가족 6명 등 7인의 충(忠), 효(孝), 열(熱), 절(節)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문(旌閭門)이다. 정려문은 충신, 효자, 효부,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마을 입구나 대문 앞에 지은 붉은 칠을 한 문으로 홍살문, 정문 등으로 부른다.
#서일환의역사야톡 #서일환의역사이야기 #역사속전라도 #양팽손 #양응정 #양산숙 #양씨삼강문 #광주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