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전라도] 대전자령 전투와 광주학생 독립운동
서일환 언론학박사·첨단재활요양병원 본부장
일제 강점기에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우리 독립군이 이룩한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 1933년 7월 대전자령 전투 등을 한국독립군 3대 대첩이라고 한다. 또한 1919년 3. 1 만세운동, 1926년 6.10 만세운동, 1929년 광주학생 독립운동 등을 일제 강점기의 3대 독립운동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전자령 전투와 광주학생 독립운동에 관한 역사적 진실이 아직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이 지휘하는 군무도독부군의 연합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을 중국 지린성 허룽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하여 크게 무찌른 전투이다.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최진동이 지휘하는 군무도독부군,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 등이 연합하여 일본군을 중국 지린성 허룽현 청산리 계곡으로 유인하여 대파한 전투이다.
대전자령 전투, 한국독립군 3대 대첩
대전자령 전투는 1933년 7월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독립군 부대와 중국호로군 부대가 연합하여 중국 지린성 허룽현 대전자령(현 태평령)에서 괴뢰만주국 산하 관동군을 대파한 전투이다. 한국독립군은 1930년 1월 25일 중국 상하이에서 이동녕, 김구, 조소앙, 안창호 등이 창건한 민족주의 계열의 정당인 한국독립당 산하의 무장조직이다. 중국호로군은 만주사변 이후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만든 항일 조직이다.
3.1 만세운동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 통치에 항거하여 고종 황제 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우리나라 최대 독립운동으로 200만 명 이상이 참여하여 7,500명 이상이 사망했다. 3.1 만세운동을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6.10 만세운동은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하여 순종 황제 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항일독립 운동이다. 학생들이 민족운동의 주체로서 역할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광주학생 독립운동은 1929년 11월 3일부터 1930년 5월까지 일본인 남학생의 조선인 여학생 희롱이 계기가 되어 일어난 독립운동으로 3.1 만세운동 이후 국내 최대 규모의 항일 운동이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본인 중학생이 광주여자고보 이광춘, 박기옥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했다. 광주고보 박준채가 항의하며 일본인 학생들과 조선인 학생들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광주학생 독립운동, 3.1운동 이후 최대 독립운동
양력 11월 3일은 음력 10월 3일로 일본인에게는 메이지 텐노가 태어난 명치절(明治節)이자 조선인에게는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개천절이다. 광주 시내 곳곳에서 일본인 학생들과 조선인 학생들의 충돌이 일어났다. 일본 경찰이 조선인 학생들을 탄압하자 광주고보, 광주농고, 광주여자고보 학생들이 동맹휴학으로 일제에 항거했다. 일제는 학생운동 가담자를 잔인하게 탄압하며 언론을 통제했다.
신간회에서 계획한 광주학생사건 진상발표회는 일제의 예비검속으로 개최하지 못했다. 하지만 1930년 3월 초까지 항일독립운동은 목포, 나주, 함평, 전주, 이리를 비롯해 서울, 부산, 평양, 함흥 등 전국 350개의 학교로 확산됐다. 5만 4,000명이 참가하여 1,462명이 구속을 당했고 2,912명이 퇴학 및 무기정학을 당했다.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 등의 해외학교와 해외단체까지 동참했다.
1953년 대한민국 정부는 광주학생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제정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유신반대 투쟁을 봉쇄하기 위해 ‘학생의 날’을 폐지했고, 전두환 정권은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학생의 날’을 부활했다. 노무현 정권은 학생의 날을 ‘학생독립운동 기념일’로 변경하고 국가기념일로 승격했다. 올해는 자랑스러운 광주학생 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91주년이 되는 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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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환 언론학박사·첨단재활요양병원 본부장
일제 강점기에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우리 독립군이 이룩한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 1933년 7월 대전자령 전투 등을 한국독립군 3대 대첩이라고 한다. 또한 1919년 3. 1 만세운동, 1926년 6.10 만세운동, 1929년 광주학생 독립운동 등을 일제 강점기의 3대 독립운동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전자령 전투와 광주학생 독립운동에 관한 역사적 진실이 아직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이 지휘하는 군무도독부군의 연합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을 중국 지린성 허룽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하여 크게 무찌른 전투이다.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최진동이 지휘하는 군무도독부군,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 등이 연합하여 일본군을 중국 지린성 허룽현 청산리 계곡으로 유인하여 대파한 전투이다.
대전자령 전투, 한국독립군 3대 대첩
대전자령 전투는 1933년 7월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독립군 부대와 중국호로군 부대가 연합하여 중국 지린성 허룽현 대전자령(현 태평령)에서 괴뢰만주국 산하 관동군을 대파한 전투이다. 한국독립군은 1930년 1월 25일 중국 상하이에서 이동녕, 김구, 조소앙, 안창호 등이 창건한 민족주의 계열의 정당인 한국독립당 산하의 무장조직이다. 중국호로군은 만주사변 이후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만든 항일 조직이다.
3.1 만세운동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 통치에 항거하여 고종 황제 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우리나라 최대 독립운동으로 200만 명 이상이 참여하여 7,500명 이상이 사망했다. 3.1 만세운동을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6.10 만세운동은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하여 순종 황제 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항일독립 운동이다. 학생들이 민족운동의 주체로서 역할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광주학생 독립운동은 1929년 11월 3일부터 1930년 5월까지 일본인 남학생의 조선인 여학생 희롱이 계기가 되어 일어난 독립운동으로 3.1 만세운동 이후 국내 최대 규모의 항일 운동이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본인 중학생이 광주여자고보 이광춘, 박기옥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했다. 광주고보 박준채가 항의하며 일본인 학생들과 조선인 학생들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광주학생 독립운동, 3.1운동 이후 최대 독립운동
양력 11월 3일은 음력 10월 3일로 일본인에게는 메이지 텐노가 태어난 명치절(明治節)이자 조선인에게는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개천절이다. 광주 시내 곳곳에서 일본인 학생들과 조선인 학생들의 충돌이 일어났다. 일본 경찰이 조선인 학생들을 탄압하자 광주고보, 광주농고, 광주여자고보 학생들이 동맹휴학으로 일제에 항거했다. 일제는 학생운동 가담자를 잔인하게 탄압하며 언론을 통제했다.
신간회에서 계획한 광주학생사건 진상발표회는 일제의 예비검속으로 개최하지 못했다. 하지만 1930년 3월 초까지 항일독립운동은 목포, 나주, 함평, 전주, 이리를 비롯해 서울, 부산, 평양, 함흥 등 전국 350개의 학교로 확산됐다. 5만 4,000명이 참가하여 1,462명이 구속을 당했고 2,912명이 퇴학 및 무기정학을 당했다.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 등의 해외학교와 해외단체까지 동참했다.
1953년 대한민국 정부는 광주학생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제정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유신반대 투쟁을 봉쇄하기 위해 ‘학생의 날’을 폐지했고, 전두환 정권은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학생의 날’을 부활했다. 노무현 정권은 학생의 날을 ‘학생독립운동 기념일’로 변경하고 국가기념일로 승격했다. 올해는 자랑스러운 광주학생 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91주년이 되는 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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