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전라도]조선 최고 천재 시인, 풍류 가객 백호 ‘임제’
서일환 언론학박사·첨단재활요양병원 본부장
백호(白湖) 임제(林悌)는 1549년 아버지 임진(林晉)과 어머니 남원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의 3대 천재 시인으로 불리었으며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저술한 중용(庸用)을 800번이나 읽었다. 을사사화 당시 속리산으로 낙향한 성운(成運)의 문인이 되어 3년간 학문에 정진하여 생원시와 진사시에 이어 문과에 급제했다. 종6품 흥양현감, 정6품 병마평사, 종5품 관서도사, 정5품 예조정랑 등을 거처 홍문관 지제교에 올랐다. 서산대사 휴정, 삼당시인 백광훈,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 조선4대 명필 양사언 등과 교우했다.
할아버지 임붕은 정3품 호조참의, 정3품 광주목사를 역임했고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의 무죄를 상소했다. 조광조가 처형되자 나주목 회진리에 귀래정(歸來亭)을 짓고 은둔했다. 숙부 임복은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유배됐다 낙향하여 귀래정을 재건하여 영모정(永慕亭)으로 개칭하고 은둔했다. 아버지 임진은 정3품 제주목사, 종2품 병마절도사를 역임했고 청백리로 녹선됐다. 외손주 허목은 정1품 우의정을 역임한 남인의 영수이자 송시열로부터 사문난적으로 몰린 실학의 비조이다.
낡은 인습 거부하고 전국 명산 유랑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 홍안을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느냐 /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것을 슬퍼하노라”, “방초 우거진 골에 시내는 울어댄다 / 가대 무전이 어디 어디 어디메오 / 석양에 물차는 제비야 네 다 알까 하노라” 임제는 호방하고 호탕하여 병마절도사의 참모로 종6품 병마평사에 임명되어 개성의 황진이 묘지에서 시조 2수를 읊었다가 부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파직됐다.
황진이는 중종, 명종 때 활약한 개성의 기녀이자 시인으로 벽계수의 콧대를 꺾어놓았고 지족선사를 파계시켰다. 서경덕을 유혹하려다 실패하고 평생을 스승으로 모셨고 대제학 소세양과 한달간 계약 연애를 하였고 선전관 이사종과 6년간 계약결혼을 하였다. 황진이의 첫사랑인 부운거사 김경원은 임제의 손위 처남이다. 황진이는 이매창과 더불어 조선의 최고 여류시인이자 서경덕, 박연폭포와 더불어 송도3절로 평가받고 있다.
임제는 30세에 스승인 성운이 사망하자 동인과 서인의 당쟁을 개탄하고 관직을 버리고 전국 명산을 주유하며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냈다. “명산을 두루 유람하여 자신의 분방, 호일한 기운을 복돋아 시에다 토해냈다.”고 정1품 영의정을 역임한 백사 이항복(李恒福)이 ‘백호집서(白湖集序)’에 임제를 평가했다. “임백호는 기상이 호방하여 검속당하기를 싫어했다.”고 ‘성호사설(星湖僿說)’을 남긴 성호 이익(李瀷)이 임제를 평가했다.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 유언
“사해의 여러 나라가 황제를 일컬어 보지 않은 나라 없거늘 / 우리나라만 예로부터 그래 보지 못했다. / 이와 같은 나라에 태어났거늘 그 죽는 것을 어찌 애석해할 것 있느냐 곡을 하지 말아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1587년 고향인 나주목 회진리에서 39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만약 고각을 세우고 단에 올라 맹주를 세워야 한다면 백호 그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정1품 영의정을 역임한 상촌 신흠(申欽)은 임제를 칭송했다.
임제는 700여 수의 시조를 비롯해 충신과 간신을 통해 현실을 풍자한 ‘수성지(愁城誌)’, 식물을 통해 역사를 풍자한 ‘화사(花史)’, 단종을 찬양하고 세조를 조롱하는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등 3편의 한문 소설을 남겼다. ‘백호집(白湖集)’과 ‘남명소승(南溟小乘)’을 문집으로 남겼다. 전남 목포에서 평북 신의주에 이르는 국도 1호선의 나주 구진포에 임제가 시를 짓고 선비와 교류하던 영모정과 천재 시인 임제가 묻힌 묘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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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환 언론학박사·첨단재활요양병원 본부장
백호(白湖) 임제(林悌)는 1549년 아버지 임진(林晉)과 어머니 남원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의 3대 천재 시인으로 불리었으며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저술한 중용(庸用)을 800번이나 읽었다. 을사사화 당시 속리산으로 낙향한 성운(成運)의 문인이 되어 3년간 학문에 정진하여 생원시와 진사시에 이어 문과에 급제했다. 종6품 흥양현감, 정6품 병마평사, 종5품 관서도사, 정5품 예조정랑 등을 거처 홍문관 지제교에 올랐다. 서산대사 휴정, 삼당시인 백광훈,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 조선4대 명필 양사언 등과 교우했다.
할아버지 임붕은 정3품 호조참의, 정3품 광주목사를 역임했고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의 무죄를 상소했다. 조광조가 처형되자 나주목 회진리에 귀래정(歸來亭)을 짓고 은둔했다. 숙부 임복은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유배됐다 낙향하여 귀래정을 재건하여 영모정(永慕亭)으로 개칭하고 은둔했다. 아버지 임진은 정3품 제주목사, 종2품 병마절도사를 역임했고 청백리로 녹선됐다. 외손주 허목은 정1품 우의정을 역임한 남인의 영수이자 송시열로부터 사문난적으로 몰린 실학의 비조이다.
낡은 인습 거부하고 전국 명산 유랑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 홍안을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느냐 /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것을 슬퍼하노라”, “방초 우거진 골에 시내는 울어댄다 / 가대 무전이 어디 어디 어디메오 / 석양에 물차는 제비야 네 다 알까 하노라” 임제는 호방하고 호탕하여 병마절도사의 참모로 종6품 병마평사에 임명되어 개성의 황진이 묘지에서 시조 2수를 읊었다가 부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파직됐다.
황진이는 중종, 명종 때 활약한 개성의 기녀이자 시인으로 벽계수의 콧대를 꺾어놓았고 지족선사를 파계시켰다. 서경덕을 유혹하려다 실패하고 평생을 스승으로 모셨고 대제학 소세양과 한달간 계약 연애를 하였고 선전관 이사종과 6년간 계약결혼을 하였다. 황진이의 첫사랑인 부운거사 김경원은 임제의 손위 처남이다. 황진이는 이매창과 더불어 조선의 최고 여류시인이자 서경덕, 박연폭포와 더불어 송도3절로 평가받고 있다.
임제는 30세에 스승인 성운이 사망하자 동인과 서인의 당쟁을 개탄하고 관직을 버리고 전국 명산을 주유하며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냈다. “명산을 두루 유람하여 자신의 분방, 호일한 기운을 복돋아 시에다 토해냈다.”고 정1품 영의정을 역임한 백사 이항복(李恒福)이 ‘백호집서(白湖集序)’에 임제를 평가했다. “임백호는 기상이 호방하여 검속당하기를 싫어했다.”고 ‘성호사설(星湖僿說)’을 남긴 성호 이익(李瀷)이 임제를 평가했다.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 유언
“사해의 여러 나라가 황제를 일컬어 보지 않은 나라 없거늘 / 우리나라만 예로부터 그래 보지 못했다. / 이와 같은 나라에 태어났거늘 그 죽는 것을 어찌 애석해할 것 있느냐 곡을 하지 말아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1587년 고향인 나주목 회진리에서 39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만약 고각을 세우고 단에 올라 맹주를 세워야 한다면 백호 그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정1품 영의정을 역임한 상촌 신흠(申欽)은 임제를 칭송했다.
임제는 700여 수의 시조를 비롯해 충신과 간신을 통해 현실을 풍자한 ‘수성지(愁城誌)’, 식물을 통해 역사를 풍자한 ‘화사(花史)’, 단종을 찬양하고 세조를 조롱하는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등 3편의 한문 소설을 남겼다. ‘백호집(白湖集)’과 ‘남명소승(南溟小乘)’을 문집으로 남겼다. 전남 목포에서 평북 신의주에 이르는 국도 1호선의 나주 구진포에 임제가 시를 짓고 선비와 교류하던 영모정과 천재 시인 임제가 묻힌 묘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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