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전라도] 보성 출신 독립운동가, 서재필
서일환 언론학박사·첨단재활요양병원 본부장
서재필(徐載弼)은 외가인 전남 보성군 문덕면 가내 마을에서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고향인 충남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서 성장했다. 8대조 서종제는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의 친정아버지이다. 6대조 서덕수는 연잉군을 왕세제로 추대하려다가 처형됐다. 생부모는 서광효와 성주 이씨이며 양부모는 서광하와 안동 김씨이다. 서재필은 양외숙부이자 이조판서를 역임한 김성근에게 수학하며 김옥균, 박영효, 박규수, 오경석 등과 교유했다.
서재필은 21세의 나이에 김옥균,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실패하자 일본으로 도피했고 다시 미국으로 망명했다. 생부 서광효, 생모 성주 이씨, 둘째 부인 광산 김씨, 동복형 서재춘은 자살했고 2살 된 아들은 굶어 죽었다. 서모와 이복형 서재형은 관군에게 살해됐다. 동복동생 서재창은 체포되어 처형됐고 동복동생 서재우는 체포됐다가 나이가 어려서 석방됐다. 양부 서광하는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비가 되었다. 양가(養家), 친가(親家), 외가(外家), 처가(妻家) 등이 멸문지화를 당했다.
서재필, 갑신정변 삼일천하로 멸문지화
서재필은 콜롬비아 의과대학 야간부를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로 의학사 M.D.를 획득했다.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개명하고 미국으로 귀화하여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갑오개혁으로 친일정권이 수립되어 작위가 회복되자 미국 시민의 자격으로 10년 만에 귀국하여 고종 황제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악수를 청했다. 조선이 근대화하려면 일본의 도움을 받아 청나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재필은 대한제국 정부의 고문으로 임명되어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했고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참여했다. 서재필은 ‘세계에서 제일 불쌍하고 더러운 백성은 조선 백성이다.’라고 비난하며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다가 고종 황제가 추방령을 내리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서 의사이자 사업가로 활동했다. 서재필은 한국은 독립할 만한 힘이 없으므로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주장하던 이승만을 지지했다.
필립 제이슨, 조선독립을 미국에 청원
서재필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청원서'를 보냈다. 재산 일부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으로 독립운동에 종사했다. 미국이 일본에 압력을 가하여 조선의 독립을 이룩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언론 활동과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미국에 대공황이 휩쓸어 사업이 파산되자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의사이자 대학 강사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군 징병 검사관으로 참전하여 미국 국방성 표창장을 받았다.
해방되자 미군정청 하지 장군의 초청으로 과도정부 특별의정관 자격으로 초빙되어 귀국하여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으로 활동했다. 1948년 7월 20일 국회 간선제로 시행된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자로 추천되어 1표를 얻었다. 하지만 미국 국적이라 자격이 박탈됐다. 미군정이 종식되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서 의료활동에 전념했다. 1951년 1.4 후퇴 다음 날 후두암과 방광암으로 88세의 나이에 사망하여 필라델피아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서재필은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고 1991년 보성군에 서재필 기념관이 건립됐다. 1994년 유해가 환국되어 둘째 부인 광산김씨와 함께 서울 현충원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2008년 워싱턴 한국대사관 총영사관 앞에 서재필 동상이 세워졌다. 서재필은 조선의 독립은 일본의 힘을 빌려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추진했고 조선 국적을 포기한 미국인 필립 제이슨으로 살았으며 미국에 청원하여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추진했다. 서재필은 매국노는 아니지만 애국자도 아니라는 부정적인 평가에 직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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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환 언론학박사·첨단재활요양병원 본부장
서재필(徐載弼)은 외가인 전남 보성군 문덕면 가내 마을에서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고향인 충남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서 성장했다. 8대조 서종제는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의 친정아버지이다. 6대조 서덕수는 연잉군을 왕세제로 추대하려다가 처형됐다. 생부모는 서광효와 성주 이씨이며 양부모는 서광하와 안동 김씨이다. 서재필은 양외숙부이자 이조판서를 역임한 김성근에게 수학하며 김옥균, 박영효, 박규수, 오경석 등과 교유했다.
서재필은 21세의 나이에 김옥균,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실패하자 일본으로 도피했고 다시 미국으로 망명했다. 생부 서광효, 생모 성주 이씨, 둘째 부인 광산 김씨, 동복형 서재춘은 자살했고 2살 된 아들은 굶어 죽었다. 서모와 이복형 서재형은 관군에게 살해됐다. 동복동생 서재창은 체포되어 처형됐고 동복동생 서재우는 체포됐다가 나이가 어려서 석방됐다. 양부 서광하는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비가 되었다. 양가(養家), 친가(親家), 외가(外家), 처가(妻家) 등이 멸문지화를 당했다.
서재필, 갑신정변 삼일천하로 멸문지화
서재필은 콜롬비아 의과대학 야간부를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로 의학사 M.D.를 획득했다.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개명하고 미국으로 귀화하여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갑오개혁으로 친일정권이 수립되어 작위가 회복되자 미국 시민의 자격으로 10년 만에 귀국하여 고종 황제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악수를 청했다. 조선이 근대화하려면 일본의 도움을 받아 청나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재필은 대한제국 정부의 고문으로 임명되어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했고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참여했다. 서재필은 ‘세계에서 제일 불쌍하고 더러운 백성은 조선 백성이다.’라고 비난하며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다가 고종 황제가 추방령을 내리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서 의사이자 사업가로 활동했다. 서재필은 한국은 독립할 만한 힘이 없으므로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주장하던 이승만을 지지했다.
필립 제이슨, 조선독립을 미국에 청원
서재필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청원서'를 보냈다. 재산 일부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으로 독립운동에 종사했다. 미국이 일본에 압력을 가하여 조선의 독립을 이룩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언론 활동과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미국에 대공황이 휩쓸어 사업이 파산되자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의사이자 대학 강사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군 징병 검사관으로 참전하여 미국 국방성 표창장을 받았다.
해방되자 미군정청 하지 장군의 초청으로 과도정부 특별의정관 자격으로 초빙되어 귀국하여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으로 활동했다. 1948년 7월 20일 국회 간선제로 시행된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자로 추천되어 1표를 얻었다. 하지만 미국 국적이라 자격이 박탈됐다. 미군정이 종식되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서 의료활동에 전념했다. 1951년 1.4 후퇴 다음 날 후두암과 방광암으로 88세의 나이에 사망하여 필라델피아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서재필은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고 1991년 보성군에 서재필 기념관이 건립됐다. 1994년 유해가 환국되어 둘째 부인 광산김씨와 함께 서울 현충원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2008년 워싱턴 한국대사관 총영사관 앞에 서재필 동상이 세워졌다. 서재필은 조선의 독립은 일본의 힘을 빌려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추진했고 조선 국적을 포기한 미국인 필립 제이슨으로 살았으며 미국에 청원하여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추진했다. 서재필은 매국노는 아니지만 애국자도 아니라는 부정적인 평가에 직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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